여름은 수영을 못 하는 사람도 물에 뛰어들게 만든다. 계곡에 발이라도 담가야 여름을 느끼는 것처럼 저마다 가진 여름 의식이 있다. 평소처럼 수영장에 도착해 걸어가려는데 주차장부터 뛰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늦은 건가 싶어 나도 덩달아 뛰었다. 수영장 로비는 정확히 두 그룹으로 나눠져 있었다. 헐떡거리는 사람은 번호표를 들었고 익숙한 여러 얼굴은 반대쪽에서 샤워 바구니를 들었다. 알림판 속 오늘은 신규 등록일이었다. 달릴 필요가 없었지만 덕분에 달리기로 아침을 시작한 셈이다. 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엔 등록신청서와 볼펜이 가득했다.
카운터 띵동 소리와 함께 줄이 짧아질수록 맨 뒤 사람은 자주 앞쪽을 살폈다. 인원이 꽉 차면 검은색 매직으로 x자가 그려지고 '마감'이라는 글자가 적혔다. 제일 먼저 기초반이 사라졌다. 그럴 때면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과 아쉬워하는 탄성이 터졌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해뜨기 전부터 채비를 단단히 하고 모인 사람, 수영으로 하루를 깨워온 사람이 한 공간에 섞여있는 날. 수영장 성수기인 7월과 8월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오던 2월. 나는 패딩에 목도리를 칭칭 감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수강신청서는 넉넉하게 쌓여 있었고 볼펜은 아무도 손대지 않은 것처럼 놓여있었다. 평소 악필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오늘만큼은 모든 글자를 반듯하게 적었다.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문서 앞에서 유난히 정성스러운 글씨를 마주한다.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그랬고 은행 계좌 개설 신청서가 그랬다. 다 적은 수강신청서를 들고 번호표를 뽑아야 하나 고민했다. 텅 빈 로비에 있는 사람이라곤 나 혼자 뿐이었기 때문이다. 번호표는 띵동 소리와 함께 의미 없이 구겨질 아까운 종이였다.
"기초반 등록하려고 하는데요"
"신청서 작성하셨어요? 새벽반 7시 맞으시죠? 여기 한번 봐주시고 한 장 찍을게요"
등록은 2분 만에 끝났고 얼떨결에 초췌한 얼굴이 웹캠에 찍혔다. 아마 화면 속 내 정보 안에는 누런 얼굴에 검은 눈썹이 도드라진 빈대떡 인간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본인 확인을 위한 과정 중 하나였는데 등록만 하고 오자는 생각으로 고양이 세수만 하고 돌돌 말아 나온 상태였다.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언제 사진 찍힐 줄 모르는 인생인데 제대로 씻고 나와야지 싶다가도 그러기엔 이 정도의 인간적인 모습으로도 다닐 수 없다면 스스로에게 너무 팍팍한 것 같았다.
회원카드 한 장이 손에 쥐어졌다. 입구 기계에 카드를 갖다 대면 지익하고 영수증이 나오는 시스템이었다. 대학 입학 전 오티 날에 처음 캠퍼스로 발을 들인 날이 생각났다. 나는 조금 더 일찍 가서 학교를 거니는 선배들을 한참 쳐다보았다. 대학생들은 무얼 입고 다니는지, 어떤 신발을 신는지, 어떤 가방을 메는지. 방학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겨우 교복을 벗은 예비 신입생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그때처럼 수영장 로비에 앉아 입장하는 사람들을 조금 바라보았다. 모두의 공통점은 "목욕바구니" 목욕탕에 갈 때만 챙겼던 그 바구니였다. 비슷한 모양의 바구니가 많았다. 파란색, 초록색, 흰색, 어떤 사람은 노란색 작은 마트 장바구니를 들고 오기도 했다. 어릴 때 손에 들렸던 파란색 수영가방과 다른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