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의 연습을 하자, 삶이 흔들리지 않게
무정의 연습은 왜 필요할까? 크게 두 가지를 다스리기 위해서다. 첫 번째는 기대다. 예전에는 공모전에 출품하면 결과를 기대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하나 쌓는다고 생각한다. 결국 확률게임이다. 실패는 실패로 남지 않는다. 실패는 성공을 위한 자리를 마련한다. 실패의 비율 위에 성공이 오른다. 그렇게 무정할 수 있었다. 무정은 지치지 않고 쌓게 만드는 동력을 불어넣는다. 무정은 차가운 불꽃이다.
관계에서도 기대하지 않으려고 주의한다. 관계를 맺다 보면 ‘이 관계에서는 이 정도 바라도 되겠지’하는 착각이 피어오른다. 그런데 그렇게 자격을 논하면서 기대하는 순간, 사람은 구려진다고 생각한다. ‘내가 누군 줄 알아?’를 들먹이는 진상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다. 내가 상대에게 베푸는 호의는 나를 위해서다. 상대가 잘됐으면 하는 나의 마음을 채우기 위한 이타적 이기심이다. 그걸 빌미로 나도 이 정도를 해주었으니, 상대에게 그만큼의 대가를 바라는 것은 사기와 다름없다. 마음은 대가성이 아니다. 언제나 교환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조바심이다. 부정적 시뮬레이션의 결과가 조바심이다.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찬 조바심을 잠재우는 건 의식적인 무정이다. 한때는 잘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잘해야겠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칫 잘하고 싶은 욕심은 가진 것 그 이상을 선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사실 나에게 없는 것을 꺼내 놓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렇기에 척할 수밖에 없다.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도 과유불급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덜어냈다.
그렇게 ‘잘하고 싶다’의 정의가 바뀌었다. 이제는 내가 지닌 것 중에 100%를 하자고 생각한다. 가지고 있는 걸 최대로 내어 보이자고 생각한다. 실상은 지닌 것만 전부 보이는 일도 어렵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이 태도가 정체를 의미하진 않는다.
그저 치아를 교정하는 것처럼, 최대의 최선이 쌓여 살며시 그릇을 넓혀준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단순히 있는 걸 나른다는 관점 덕에 떨지 않게 되었다. 척하지 않아 당당하고, ‘진짜’인 상태로 임할 수 있었다. 나에게 잘한다는 건, 내게 없는 걸 있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걸 충분히 꺼내놓는 일이다. 그렇게 하니, 마음이 편했다. 발을 헛디디는 일도 적었다. 모두 무정의 연습 덕이다.
무정은 어쩌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찾아낸 처세술이다. 올인하지 않는 태도이며, 브레이크에 발을 대고 운전을 하는 태도이다. 삶은 정으로만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음'이란 결코 무한하지 않다. 그렇기에 내가 진정으로 건네고 싶은 무언가에만 쓰기도 모자라다. 무정은 마음을 절약하는 방법이다. 의식적인 무정으로 삶은 이전보다 행복하다. 이는 삶의 유격이 줄이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