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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Jan 21. 2024

곧장 바라보는 일

直指




혹시나 유심히 본 사람이 있다면 이 연재는 유식학唯識學적 틀 안에서 흘러가고 있음을 눈치챘을지 모른다. 그래서 지난 연재에 팔식八識 정화를 다루었으니 오늘은 청정심淸淨心이다.


사실 나는 며칠 전 마주한 버트런드 러셀의 ‘카인들리 필링(kindly feeling)’에 아직 꽂혀있다. 안 그래도 진부한 거 좋아하는데, 너무나도 진부한 저 두 단어의 조합이 생각할수록 신선하므로 꽂힘의 이유에 대해서 수요 없는 공급을 시작해 본다.


진지하게 근현대 철학사조를 논하는 자리에서 난데없이 저런 순진무구한 표현을 날린 러셀. 그의 '카인들리 필링'은 다른 말로 하면 청정심이다. 누군가의 창작이 청정심에서 나온 것인지 에고(ego)가 쥐어짜 낸 산물인지에 관한 것이다. 청정심에서 나온 창작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생명력이 있고, 그런 것들을 접하면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리는 느낌을 받는다. 소위 '축의 시대(Achsenzeit)'를 살았던 사람들의 창작이 내겐 그렇게 다가오고, 근현대 인물 중에서는 자기가 믿는 바를 위해 최소 감옥 정도는 갔던 실천지형 철학자들의 말이 그렇게 다가온다.


내가 kind라는 단어를 여사로 보지 않는 이유는 종교와 철학의 궁극적 지향점이 '타자에 대한 친절‘이라고 결론 지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또 바뀌겠지만 지금 그렇단 말.


그리고 feeling은, 진리의 한 자락을 말로 어떻게 해 볼 재간이 없을 때 - 초입방의 존재가 입방의 차원으로 내려오면 왜곡되는 것처럼 -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다'싶은 단어라서 또 고맙고.


그래서 이 두 개를 합칠 생각을 한 그 사람의 마음이 너무 동그랗고 날카로워서 '청정심을 이렇게도 표현하는구나!'싶으면서, 내가 알고 아끼는 무언가에 대한 다른 하나의 예쁜 해석을 선물 받은 감동에 정신 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청정심은 경전 속에나 있는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고 일상적으로 끌어다 쓰라고 있는 원천적 힘이다. 내 안에 버젓이 있으면서 '나 좀 갖다 쓰시오!' 하고 있는. 게다가 매일 매찰나 새 거다. 이 힘에 기대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리 단조로운 일상도 살아낼 수 없다. 끝으로 어제 사용한 청정심 용례:


부부싸움이 일어남.

청정심을 곧장 바라봄.

이럴 일이 아님을 알게 됨.

더 바라봄.

진실로 그럴 일이 아님을 알게 됨.

청정심이 온통 나를 물들임.

그 상태의 나는 찰나부처임.

남편이 불쌍해 보임.

화난 내 모습이 웃김.

부부싸움 끝.


청정심에 기대 산다고 해서 부부싸움을 안 할 순 없다. 그저 빨리 종료시킬 수 있을 뿐. 나는 언제까지나 어떠한 '상태'에 있을 뿐이지 어떠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실망하거나 우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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