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지금 어디쯤 왔을까? 물론, 여러 의미가 있어. 아무리 시인이길 포기한 나라도, 항상 시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법이야. 시는 누구에게나 불쑥 찾아오는, 낯설고도 익숙한 손님이니까.
시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라고 해도 좋을 거 같아. 난 모든 신선한 생각과 직관이 하나의 시라고 생각해. 누군가는 그걸 비전이나 신, 혹은 사랑이라고 부르는 거지.
시가 어디쯤 왔는지 궁금해질 때, 그걸 좋아하게 되는 거 아닐까? 언제일진 모르지만, 분명 한 번 더 내게 안부를 물어줄, 모든 계기를 기대하고 있는 거야. 물론 그것의 절반은 안 좋은 일이란 걸 알고서도 말이야.
이상한 헛소리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으로서, 언제나 시가 어디쯤 왔을지 기대하게 돼. 하나의 지독한 정신병이야. 조금만 틈이 나면, 혼자만의 세계에 몰두하는 거니까. 아무튼, 그게 어디쯤 왔는지 확인하는 기쁨과 슬픔이, 내가 누구인지 알려준다고 생각해.
시는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어. 당장에 하나의 시가 되어줄 때도 있고, 세상이라는 거대한 퍼즐을 푸는 힌트가 될 때도 있지. 시상은 어디에든 갈 수 있는 영감의 집합이니까. 모든 존재가 시인이라는 말은 이런 뜻이 아닐까 싶어.
시의 또 다른 의미는, 사람들이 흔히 동심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들이야. 물론, 앞에서 말한 시상의 의미와 비슷하지만, 결과는 사뭇 다르지.
시는 존재의 자유로운 형태를 말하기도 해. 그걸 굳이 ‘동심’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사람들은 자신이 시인이란 걸 알고 있지만, 그런 자신을 과거에 묻어두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거든. 모두가 시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시간을 맞이해. 지금은 아닌, 먼 옛날의 추억 속에 말이야. 자유란 그만큼 거대한 대가가 필요한, 무시무시한 개념이니까.
모두가 자유롭다는 개념과 거리를 두게 돼. 동시에, 존재를 존재답게 만드는 것도, 존재가 영원히 추구하는 것도 자유라는 모순을 발견할 수 있지. 시가 어디쯤 왔는지 확인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전혀 다른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해. 자본 사회에서는 돈이지. 즉, 시가 어디까지 왔는지 돈이 확인해 준다고 생각하는 거야. 모두는 자유야. 제도가 쌓아 올린, 위대하고 방대한 기준 속에서 소비해 준다면 말이야. 우린 편리한 자유를 발명해 낸 거야. (물론 이게 나쁜 건 아니지만)
세 번째 의미도 마찬가지지. 이 시대의 시는 어디에 있는 걸까? 물론 이건, 나 혼자 생각한 의미가 아니야. 내가 한창 공부에 매진하고 있을 때, 운 좋게 만난 지식인과 아버지가 알려준 지혜지.
한 임시 교수가 이런 말을 했어. 지금은 세상의 모든 요소가 전에 없을 정도의 속도로, 끝없이 변화하는 시대라고. 계속해서 서로 다른 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이 하나의 화학반응이 되어서, 새로운 형태를 수없이 개발하는 방식이지.
이쯤에서 그는 한 마디 덧붙였어. 이런 시대에서, 이미 사망 직전인 문학은 어떤 변화를 이뤄내야 할까? 여전히 그것이 인류의 지식을 담당하는 거대한 부분일 수 있는 걸까? 여전히 종이인 상태로? 문학이 이 유례없을 정도의 암흑기를 이겨내려면, 그 형태에 획기적인 변화를 이뤄내야 할 거라고 말이야.
흠, 지금 생각해도 좋은 생각이야. 당시엔 더 동의하고 있었지. 덕분에, 관련한 생각을 더 잘 정리할 수 있었고.
아버진 이런 얘기를 했어. 80~90년대 이후로, 시대와 역사를 통찰하고 비평하는, 한국 문학의 거대한 명맥이 끊겨버린 거 같다고 말이야.
나도 그 말에 동의하는 바야. 시문학은 특히 심각하지. 한국 문학의 틀을 종이책으로 한정한다면, 이 정도로 암울할 수 없을 정도야. 흠……. 변명이지만, 이 암흑기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엔 무리가 있을 거 같네. 애초에 내가 다루기 버거운 주제니까. 아버지나 교수는 암흑기를 증명할 만한 내력이 충분하겠지만, 난 전혀 아니거든. 내가 느끼는 이 암흑기는 뭐랄까, 훨씬 직감에 가까운 거야.
다행히도 네 번째 의미는 세 번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겠어. 이걸 알려준 분은 친구의 어머님이야. 그 친구네 가족은 정말 유별나. 그들은 내게 인생을 자유롭게 즐기는 지혜를 알려줬지. 거실에 음악을 틀어놓으면, 온 가족이 댄스 삼매경에 빠지는, 그런 가족이야.
그날도 한바탕 작은 춤 파티가 열렸지. 친하긴 하지만, 외부인인 날 아랑곳하지 않았어. 어머님은 춤을 마치곤, 나와 친구를 앉혀놓고, 여러 세상 얘기를 해주셨지.
그때 해주신 말이 기억나. 요즘은 시가 책 속에서 뛰쳐나와, 다시 노랫말이 되었다고 말이야. 그 옛날에 사람이 부르는 노래 자체가 시였던 시대처럼, 지금은 장르를 막론하고 시의 영혼이 음악에 머무르고 있다는 거야. 특히 젊은이들이 적는 랩 가사에 깊은 인상을 받으신 거 같았지.
이 주장을 듣고, 난 소름이 돋았어. 물론, 민중의 노래가 시가 아니었던 역사란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젠 시 속에 머무르던 시상이 노래나 SNS, 드라마나 광고 속으로 이사 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이젠 시만이 할 수 있었던 역할을 다른 매체가 해줘야 하는 시대라고 말이야.
그래, 시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다시 생각해 봐도, 이 주제는 나에게, 하나의 애증이야. 오래된 첫사랑 같은 거지.
시는 절대 특별한 게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빠르게 멀어져 가는 위치에 와있는 것 같아. 나 자신도 시의 위대함이 두려워서, 시인의 꿈을 포기했으니까 말이야. 모르는 사이에 우린, 시가 특별하거나 유별난 무언가라고 생각해 버리고 있어. 우리의 시가 아직 어딘가에 있다면, 부디 그렇게 멀리 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냥 내 작은 바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