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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식 Apr 19. 2024

논산 은진미륵, 딸기, 황산벌의 공통점

국도 1호선 지질 여행

세종시를 지나 계룡산을 끼고돌아 남쪽으로 내려온 1번 국도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논산시로 들어온다. 논산시는 곡창지대답게 넓은 평야지대여서 시원한 조망이 특징이다. 간혹 언덕 같은 야트막한 산들이 있기는 하지만 정말 평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예전엔 곡창지대로 유명했지만, 이제는 딸기로 바뀌어 매년 3월 말 딸기축제 때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전국 딸기 생산량의 13%(면적기준 15.9%)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런 지형이 생긴 원인은 화강암이 넓게 분포하여 오랜 시간의 힘으로 침식된 평평한 분지이기 때문이다. 제천, 충주, 청주, 대전도 같은 화강암 침식분지이다. 분지는 물이 모이고 농지가 있고, 그래서 사람이 모여 마을과 도시가 만들어지는 지역이다. 사람이 모이면 종교와 권력 등 힘이 생긴다.


남한의 주요 화강암 침식 분지, 지도출처: Naver


위 사진에서 보듯이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화강암 침식 분지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이어져 있다. 이는 중생대에 우리나라 화성 활동을 유발한 한반도 주변의 판구조 운동에 기인한 바가 크다. 멀리 서태평 양 지역에서 해양판이 유라시아판 밑으로 침강하면서 이 지역에는 화성활동이 발생해 화강암벨트가 생긴 것이다.


관촉사(灌燭寺)


국도 1호선 변 유명 사찰 중 접근성이 가장 좋은 곳의 하나가 논산시 은진면 반야산(96.2m)에 위치한 관촉사이다.


관촉사 전경, ⓒ 전영식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반야산(般若山)에 있는 고려전기 승려 혜명이 창건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968년(광종 19) 창건 당시 조성한 ‘은진미륵’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현존하는 절건물로는 관음전과 삼성각(三聖閣)·사명각(四溟閣)·해탈문(解脫門)·현충각 등이 있으며, 중요 문화재로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 1962년 국보지정)과 논산 관촉사 석등(1963 보물지정), 충청남도 유형문화재인 배례석, 충청남도 문화재자료인 석문, 오층석탑·사적비 등이 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


석조미륵보살입상, ⓒ 전영식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국내 최대 석불(높이 18.12m)로서 통칭 ‘은진미륵’이라고 부른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마징가 Z는 높이가 18m이니  은진미륵이 더 크고,  태권 V의 30m(56m라는 설도 있음)보다는 작다. <트랜스포머>의 옵티머스 프라임은 10m나 작은 8.5m(28피트)라고 한다.


미륵불은 석가모니가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난 뒤에 나타난다는 부처를 말한다.


절의 사적비에 의하면 고려 제4대 왕 광종(925~975) 19년(968년) 때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꺾고 있던 두 여인이 아기울음소리를 듣고 주변을 찾아보니, 애기는 없고 거대한 바위가 솟아오르고(태어나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화강암 형성에  대한 지질학적으로 정확한 표현이다. 이를 들은 광종은 970년(광종 21) 혜명대사에게 명하였고, 석공 100명이 투입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37년이 지난 1006년(목종 9)에 불상을 완성했다.


하지만 불상이 너무 커서 이를 세우지 못하고 고민하던 중 두 명의 동자가 강가에서 평지에 불상의 아랫부분을 먼저 세운 뒤 그 주변에 모래를 경사지게 쌓아 불상의 가운뎃 부분(전설에 따르면 가운데 몸 부분의 돌은 연산면 우두골에서 가져왔다고 한다)을 위로 밀어 올리고, 다시 그 주변에 모래를 더 높이 쌓아 불상의 윗부분을 밀어 올리는 놀이를 하고 있는 것에서 힌트를 얻어 불상을 세웠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세운 것과 같은 방법이다. 그 동자들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화현 하여 가르침을 준 것이라고도 한다.


불상이 세워지자 하늘에서는 비를 내려 불상의 몸을 씻어 주었고 서기(瑞氣)가 21일 동안 서렸으며, 미간의 옥호(玉毫)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었다. 중국의 승려 지안(智眼)이 (동방박사처럼) 그 빛을 좇아와 예배하였는데, 그 광명의 빛이 촛불의 빛과 같다고 하여 절 이름을 관촉사라 하였다고 한다.


관촉사 전경, ⓒ 전영식


불상의 모습은 머리와 손을 강조한 표현 양식으로 인해 자비로운 보살이라기보다 토속적인 신의 모습을 보는 듯 위압적이며, 강한 메시지와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마치 왕릉의 문인석, 무인석을 크게 확대해 놓은 인상이다. 이 불상은 이상적인 우아함을 추구한 신라 불상과 전혀 다른,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보이는 새로운 양식으로 불상 전체에서 느끼는 원초적인 힘은 고려 초기에 널리 유행한 불교 예술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보살상은 좌우로 빗은 머릿결 위로 지금은 없지만 높은 원통형 보관(寶冠)을 썼고(설치한 구멍은 남아 있다) 두 손으로 청동제 꽃을 들고 있다. 널찍하고 명확한 이목구비와 가냘프지 않은 압도적인 크기 등은 한국 불상 중 가장 독창적이고 특색 있는 미의식을 창출한  사례로 꼽힌다. 우아한 이상미구한 통일신라 조각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담고 있어 우리나라 불교신앙과 조각사에 있어 중요하고 독창성과 완전성 측면에서도 뛰어나다.


10세기 후반 충청도에 많이 조성된 거대  석조 불상의 모델로 부여 임천의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지방적 특색을 잘 드러내는 불상으로 평가된다.


고려시대의 석불은 세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첫번째 시기는 건국부터 문종(1083) 때까지이다. 이 때는 새로운 양식이 대두되어 신라 말기에 비해 훨씬 큰 대작들이 나타났다. 대부분이 신라 양식을 계승하기도 했지만, 관촉사 은진미륵처럼 특징적인 얼굴과 면을 중심으로 조성된 석불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논산 관촉사 석등


논산 관촉사 석등,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5.45m. 현재 관촉사 앞뜰 원래 위치에 보존되어 있으며 조성연대는 보살입상과 같이 968년(광종 19)으로 추정된다. 현재 보수공사 중(~2024년 5월)이다.


이 석등의 하대석은 네모난 측면석 위에 둥근 연화대를 놓았는데, 8판의 복련(覆蓮)은 꽃잎 주위에 좁은 테두리가 있어 신라시대 연판과 다른 점을 보이고 있다. 하대 윗면에는 2단의 굄을 새겨서 기둥을 받치고 있는데, 기둥은 원통형으로 상단부와 하단부에는 두 줄의 띠를 새겨 놓았고, 가운데는 세 줄로 마디를 만들어 중앙부에 중심의 굵은 원대 위에 네 잎의 복판연화문(複瓣蓮花文)을 새겨 놓았다.


상대석은 사각형이고, 아랫면은 쌍잎 8판의 앙련대(仰蓮臺)가 있고, 그 밑에는 2단의 받침이 새겨져 하대석과 대칭을 이룬다. 상대 윗면에는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을 놓았는데, 화사는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부인 주화사는 네 개의 우주석(기둥)만을 세워서 지붕을 받치도록 하였으므로 화창은 4면이 통하게 되었고, 창구가 넓다. 상부의 화사는 형식적으로 구성되어 전·후면에만 화창을 조각하였다.


옥개석 정상에는 한 개의 돌로 조성한 둔중한 보주(寶珠)가 놓여있는데 큼직한 몸체에 비해도 보주로서는 큰 편이다.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고려의 석등으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배례석



오층석탑 앞에 위치한 배례석은 너비 40㎝, 길이 150㎝의 직육면체 화강암 위에 팔엽(八葉) 연화 3개와 연지(蓮枝)가 실감 나게 조각되어 있다. 장방형의 대석으로 앞면의 긴 쪽에 3개, 옆면에 2개의 안상(眼象)을 새기고, 안에 버섯구름모양을 양각했다. 연꽃잎이 뾰족하게 조각했으며 가운데 연꽃에서 좌우로 뻗어가는 연지는 매우 사실적이다. 보존상태가 매우 좋고 조각이 뚜렷하고 힘이 있어 석탑보다 우수하다. 좋은 석재를 썼다.


관촉사 미륵전에서 바라본 은진미륵, ⓒ 전영식


은진미륵의 암석


은진미륵은 암회색의 화강섬록암이다. 흑운모가 많은 중립 내지 조립질이다. 관촉사의 배경과 기반암을 이루는 암석절벽도 화강섬록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윤석봉 등에 의하면 석불입상과 기반암의 전암대자율 측정치(6.61~15.7 x10-3 SI unit) 및 지구화학적 분석결과, 두 암석은 분화과정이 동일한 마그마로부터 형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보살입상을 만든 암석은 굉장히 균질한 암석인데 아래 사진에서 보듯 얼굴 부분에도 흰색의 페그마타이트 세맥이 일부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미륵의 눈동자, 윗 눈꺼풀과 아래 눈꺼풀이 만나는 눈의 양쪽의 각인 내외안각 주름은 검은 점을 찍은 것이 아니고, 검정 점판암을 잘 갈아 맞추어 끼워 넣은 것이다. 점판암의 산지 추정을 하면 재미있을 듯한데, 아직 연구된 바 없다.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 얼굴 부분, 눈동자와 내외안각은 점판암이다.  ⓒ 전영식


둥근 미간 사이에 백호(지름이 30.5cm)가 있는데, 원래는 천연수정으로 만들어졌으나, 자연적으로 떨어져(세 조각이 났는데 부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음), 조선 중종 16년인 1521년에 청동제로 새로 만든 것이다. 녹물이 흘러나와 보살상의 얼굴이 얼룩져 1960년에 수정으로 교체했다가 현재는 금동제 백호가 부착되어 있다. 아래가 당시 붙어있던 원래의 백호인데 관촉사가 보관하던 중 고시공부를 하러 온 부산의 모대학생이 군대 가면서 가져갔다가 언론에 도난기사가 뜨자 냉큼 반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관촉사 보살상 동합금 백호(지름 30.5cm),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호사가들의 이야기 중에는 원래 은진미륵의 백호에는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가 박혀있었는데, 일제 때 일본인들이 그걸 떼어갔고 광복 때 가지고 갈 수 없자, 경찰서에 신고해서 떼어낼 때 세 조각으로 부서진 백호가 부여박물관에 있었다는 낭설이 있었다. 불상과 다이아몬드, 일본사람이 얽혀 재미난 이야기가 되었다.


관촉사에서 바라본 논산벌판, 멀리 황산벌이 보이는 듯하다. ⓒ 전영식


계백이 최후를 맞은 황산벌


지자체의 홈페이지는 가장 그 지방을 잘 알 수 있는 방법이다. 논산시청 홈페이지에는 논산이 한반도의 '단전' 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계백(階伯,? ~ 660)의 5천 결사대가 김유신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으로 내세운다. 가운데 위치야 그렇다 치고 결전을 벌인 곳이란 이야기는 지리적 전략성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결전이 벌어진 황산벌(黃山伐)은 지금의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와 신암리 일대로 알려져 있다. 신라군이 부여로 가려면 꼭 통과해야 하는 지역이었고 그래서 계백의 결사대는 이름처럼 결사적으로 싸워야 했던 곳이다. 여기서 백제의 수도인 부여까지는 걸어서 8시간 정도 걸린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분지는 낮은 곳도 중요하지만 분지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도 중요하다. 보통 지질구조의 차이나 암석의 차이로 경계가 정해진다. 화강암이 풍화된 논산 평야지역의 동쪽 경계는 시대가 정해지지 않은 옥천계 변성암 지층이 차지하고 있다. 이 암석들은 화강암보다 침식에 강해서 300m를 넘는 험지를 이룬다(평야지역에서 이 정도면 장벽이다).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 내지 이동로로 쓰이고 분지 경계지역에서 두 세력이 맞붙게 된다. 그래서 전쟁터가 되기 쉬운데 황산벌이 바로 그 예이다.


논산 지역 지질도, 노란색 원이 황산벌이다. 출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분지 내부는 편평하기 때문에 특별한 군사적 방어시설을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삼국사기에서도 보면 백제와 신라는 별다른 성이나 시설물 없이 말을 타고 주로 전투했음을 볼 수 있다. 신라 화랑 관창(官昌, 645~660)은 2번의 패배로 시신이 말안장에 묶여 돌아왔다. 이에 꼭지가 돈 신라군은 계백의 5천 결사대를 전멸시켰다. 지질학적 사실이 역사적 사실과 만나는 지점이다.


절묘한 연무대의 위치


마찬가지로 육군군사학교인 논산 연무대는 화강암 침식분지 안에 편평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잘 꾸며진 영내는  평지 골프장 같아서 기복이 거의 없다.


동남쪽 주변부는 기반암인 편마암인데 역시 풍화에 강해 산악지역까지는 아니지만 꽤 험한 산지를 이룬다. 화강암이 풍화되면 물 빠짐이 좋은 마사토가 형성되는 반면, 편마암지대는 물 빠짐이 좋지 않은 진흙구덩이가 된다. 


전쟁이 장소를 가려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름지기 훈련은 다양한 지형과 지표상황에서 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연무대는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다. 생활은 화강암분지에서, 훈련은 호남고속도로 근처 편마암지대에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백은 이름을 남기려 했는지 몰라도 마지막 장소는 지질학적 특성에 의해 이름이 남겨졌다. 지금의 논산딸기도 화강암의 풍화토인 물 빠짐이 좋은 마사토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은진미륵 역시 논산을 이루는 화강암이 존재했기에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논과 산밖에 없다는 논산은 결국 지질학적인 환경으로 특징지어진 운명인 것이다.


참고문헌


1. 윤석봉, 곽연천, 박성미, 이정은, 이찬희, 최석원,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암석학적 특성과 풍화훼손도, 2006, 자원환경지질, 제39권 제6호, p. 629~641

2.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은진미륵' 새까만 눈동자의 비밀…'못난이 아니라 볼매였네', 경향신문, 2020.8.25

3. 진흥섭, 석불, 대원사, 1989

4. 최선주, 고려초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에 대한 연구, 미술사연구, 14, 미술사연구회, 2000

5. 최선주, 박물관 큐레이터로 살다, 주류성, 2022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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