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영식 Nov 01. 2024

대륙이동설 창시자, 베게너의 반세기 생애

 11월 1일에 태어나고 죽다, 우리 주변 과학이야기,

어느 학계나 그렇듯이 진보적이고 이단적이기까지 한 생각은 전통 학계의 밖에서 나온다. 학계란 것이 실험과 증명으로 이어지는 엄격함 속에 보수주의적인 성격이 강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신참자나 타 분야의 전문가를 그리 반갑게 맞아주는 곳이 아니다. 지질학계에서 알프레드 베게너(Alfred Lothar Wegener, 1880~1930)가 딱 그랬다. 


<아이스 에이지 4: 대륙 이동설>(2012), 제공: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알프레드 베게너는 1880년 11월 1일 독일 베를린의 목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전공은 천문학으로,  베를린대학에서 1905년 '알폰소 표(Alfonsin table)'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하지만 이 논문은 천문학에 대한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논문이 되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기상학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린덴베르크 연구소에 취직하여 상층대기의 연구를 하게 된다. 


기상학자인 그가 32세에 지질학자의 전문분야에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내어 놓은 것은 1912년이었다. 당연히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는 움추러들지 않았다. 자신의 전공분야인 기상학을 연구하면서 남은 시간을 지질학에 매진했다. 그가 내어 놓은 학설인 '대륙 이동설'인데 결국 그간의 지질학의 틀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이제는 어린이들도 다 아는 내용이다. 언제나 이단적인 생각은 많지만 그중 성공적인 결말로 이어지는 경우는 가물에 콩 나듯 적다. 그래서 베게너의 케이스는 특별하다.

* 표지 사진 : 알프레드-베게너 연구소(Alfred Wegener Institut, Bremerhaven), 극지와 그 해양 연구


그의 학설이 인정받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 중에 모아진 막대한 해수면 밑의 지형 데이터가 해석되어 나오면서 비로소 인정받기 시작했다. 한 패러다임이 바뀌는 데는 시간이 들어간다.  안타깝게도 그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1930년 11월에 그린란드 탐사 중 조난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마침 그날은 그의 50번째 생일이었다.  11월 1일에 태어나 11월 1일에 세상을 떠난 베게너의 이야기이다. 


알프레드 베게너(Alfred Wegener), 1910, 위키미디어 Public Domain


베게너는 1880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유능한 기상학자였으며, 같은 기상학자 블라디미르 쾨펜(Wladimir Peter Köppen, 1846~1940)의 사위이기도 하다. 그가 제안한 쾨펜의 기후구분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열대-건조-온대- 냉대-한대의 구분이다. <지질 시대의 기후>(1924)라는 책을 대륙 이동설을 주장한 사위와 함께 집필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고기후학(paleoclimatology)의 창시자로 인정받고 있다.


장인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유능한 기후학자여서 1906년 26살 때 그의 형과 함께 세계 최초로 기구를 이용해 북극 상공의 대기를 관측했고, 같은 해에 그린란드 탐험대에 합류하여 연과 기구 등을 이용하여 대기를 관측했다. 1913년 블라디미르 쾨펜의 딸 엘제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베게너는 독일 제국군 육군 예비역 보병 장교로 소집되어 프랑스 칼레(Calais) 전투에 참여했다. 전투에는 소질이 없었는지 지질학의 신이 그를 보호했는지, 그는 2번의 부상을 당하고 다행스럽게 육군 기상대에 옮긴다. 이 동안 대륙이동설에 대한 뒷받침이 되는 자료들을 조사한 것은 물론이다.


<대륙과 대양의 기원>(Die Entstehung der Kontinente und Ozeane), 1915, 위키미디어 public domain


그는 1911년 가을, 마르부르크 대학(Philipps-Universität Marburg) 도서관에서 우연히 브라질과 아프리카 사이에 옛날에 육교가 있었을 것이라는 내용의 헤르만 폰 이에링(Hermann von Ihering, 1850~1930)의 논문을 발견했다. 그래서 육교가 이어진 위치에서 같은 화석종이 발견된다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두 지역에서 나타나는 지질과 화석(글로소프테리스와 메소사우루스)을 연구하게 되었다. 


베게너의 팡게아, 위키미디어: Von Alfred Wegener erstellte Karte


1910년,  베게너는 세계 지도에서 아프리카 대륙과 남미 대륙의 해안선이 가져다 붙이면 딱 맞는 것을 보고,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대륙이 예전에는 하나로 붙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대서양 양쪽 대륙에서 동일한 화석이 발견된다는 육교설은 베게너에게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웃기는 이야기쯤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말이다. 


1912년에 그는 <대륙의 기원에 대하여>라는 글을 독일지질학회지에 게재하고 프랑크푸르트 학회에서 발표했고, <대륙의 기원>이라는 책을 내면서 대륙이동설을 처음 소개했다. 이어 1915년에 낸 <대륙과 해양의 기원 The Origin of Continent and Ocean>에서 그는 과거에 존재했던 판게아라는 초대륙이 분열되어 현재의 대륙을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1919년에 2판, 1922년에 3판, 1929년에 4판을 출간했다. 


알프레드 베게너, 1912, 위키미디어 public domain


이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발견이었지만, 시기가 안 좋았다. 1차 대전으로 유럽의 학문적인 소통은 멈추었다. 또 그가 독일어로만 논문을 발표해서 패전국 출신 과학자의 이론은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그나마 그 당시의 지질학자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당시 지질학계에서는 동물의 화석이 두 대륙간에 같이 발견되는 이유로 동물들이 나무토막 등으로 이동했다는 표류설, 과거의 대륙 사이에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이어져 있었다는 징검다리설, 대륙과 대륙 사이에 좁은 길이 육교처럼 나 있어서 동물들이 다른 대륙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는 육교설 등이 주장되고 있었다. 


당시의 학자들은 그 무거운 대륙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베게너는 빙하가 녹음에 따라 스칸디나비아가 100년에 1m씩 솟아오른다는 당시의 상식을 적용하면, 대륙의 하부에는 충분히 유동성을 갖은 존재가 있다고 믿었고 대륙의 수평이동도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베게너의 때 이른 죽음


10년이 지나 그의 이론이 다른 유럽국가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호응도 있었지만 반대도 심했다. 1926년 11월에 미국 지질학회는 베게너를 초청하여 대륙이동설을 사이비과학이라고 몰아붙이는 심포지엄도 열었다(정말 그렇다면 이런 심포지엄은 왜 개최했는지 의문이다). 이런 지질학자들 간의 논쟁은 베게너가 1930년에 그린란드 탐험에 나섰다가 조난당해 죽었을 때에도 지속되고 있었다. 베게너의 사망 소식에 많은 사람들은 그의 기상학자로서의 업적을 찬양했지만, 대륙이동설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대륙 이동설이 늦게 받아들여진 요인 중에는 켈빈 경을 필두로 한 물리학계의 지질학계 압박, 이에 대한 지질학계의 타 분야 전공자의 간섭을 싫어하는 분위기도 한몫했다.  


1930년 11월 1일, 실종 하루 전에 찍은 사진. 왼쪽이 베게너, 오른쪽은 덴마크인 라스무스 빌룸센(Rasmus Villumsen), 위키미디어 Public Domain

[사진설명] 1930년 11월 1일, 실종 하루 전에 찍은 이 사진에서 왼쪽이 베게너, 오른쪽은 덴마크인 라스무스 빌룸센(Rasmus Villumsen)이다. 다음 날, 둘은 조난당했고 6달이 지나서야 시체로 둘 다 발견되었다.  베게너가 침낭에 쌓인 상태로 발견된 것으로 보아, 베게너가 먼저 죽고 빌룸센이 매장해 준 것으로 보인다. 베게너는 만 50번째 생일에 실종되었고, 빌룸센은 약관의 나이인 23살이었다.


SIAL층과 SIMA층의 위치, 위키미디어: public domain


사실 그 당시 사람들이 대륙이동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베게너가 "그럼 대륙이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게너의 주장은 우선 지구상에는 빈도가 높은 2개의 높이가 있는데 하나는 0m인 해수면이고 다른 하나는 수심 5,000m인 심해라는 것이다. 밀도가 비교적 낮은 대륙층(SIAL-layer)은 해수면 근처에 위치하고, 밀도가 더 높은 하부층(SIMA-layer)은 수심 5,000m 부근에 존재하며, 저밀도층이 고밀도층 위를 '미끄러져'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당시 베게너의 학설로는 이 에너지가 어디서 어떻게 공급되는지 설명을 할 수 없었다.


당시 베게너도 이러한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주장한 대륙이동의 힘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지구의 자전력에 따라 극지에 있던 대륙들이 적도 쪽으로 몰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달과 태양에 의한 조석력이었다. 하지만 베게너도 자신의 이론에 100% 확신할 수는 없었고 많은 추가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고 마무리해야만 했다. 


대륙이동설의 원인이 밝혀지다


북대서양 해저의 연령지도, 위키미디어: Pasixxxx, public domain


그러나 1962년, 프린스턴대학교의 헤스(H. Hess, 1906~1969)와 다이츠(R. Dietz, 1914~1969)에 의해 맨틀대류를 바탕으로 맨틀물질이 해령을 축으로 좌우로 확장되어서 해양지각을 형성하고, 이 지각은 판 경계에 위치한 해구에서 섭입 한다는 내용인 해저확장설이 발표된다. 그 후 고지자기 연구를 통해 해저에서 해령을 축으로 한 자기 역전 방향의 대칭성이 나타난다거나, 거리가 멀수록 두꺼워지는 해저 퇴적물의 두께, 해양지각의 나이를 조사하면서 해령에서 멀어질수록 연령이 높아진다는 증거들이 발견되면서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은 점점 설득력을 얻게 된다. 


지질학자들이 그토록 공격했던 "어떻게 대륙이 움직인단 말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온 것이다. 지각이 맨틀 위에 떠서 움직인다는 판구조론은 지질학의 혁명이었으며, 1960년대 후반에는 모든 학자들이 이 학설을 받아들이게 된다. 나중에 맨틀의 대류를 일으키는 에너지는 방사성원소의 붕괴임이 밝혀졌다. 




베게너는 조난당해 목숨을 잃은 현장에 묻혔다. 그래서 지금도 그곳에 남아있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쓴 빌 브라이슨은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서 그의 죽음에 대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물론 그가 사망했을 때보다 1미터 정도 북아메리카 쪽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알프레드 베게너는 그의 여러 학문에 대한 열정, 대륙이동설의 주창 그리고 드라마틱한 죽음으로 기억되고 있다. 독일에는 그의 이름을 딴 발프레드 베게너 연구소가 가장 큰 해양연구소로 운영되고 있다.


요즘 대학을 보면 이공대에는 연구 제목만 보면 무슨 과에 속하는지 알기 어려운 연구들을 많이 한다. 학제 간 연구라고 간단히 이야기하지만, 현실적으로 연구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는 쉬운 일은 아니다. 학부시절에 단편적으로 배운 지식으로는 어림도 없다. 따라서 학부 졸업 후 심지어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도 완전히 다른 분야로 연구범위를 바꾸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결코 전부가 아니고, 전부일 수도 없다. 끊임없이 발전하는 과학과 기술에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장벽은 장애물이 아니다.  자연에는 전공이 없고 이과문과도 없다. AI가 대세인 시대에 AI에게 전공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 장애물에 갇힌 것은 인간뿐이다. 나 스스로 만들어낸 장벽은 없는지 잘 살펴볼 일이다.


참고문헌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 까치, 2003

최덕근, 내가 사랑한 지구, 휴머니스트, 2015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작가의 이전글 토끼, 쓸모 없음의 쓸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