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에 조그마한 텃밭을 마련했다. 남편은 노년에 용돈 벌이한다면서 밭 둘레에 호두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수확이 신통치 않다. 날짐승이 따가는 게 분명했다. 그나마 남은 열매를 거둬보면 구멍이 뻥뻥 뚫린 빈 호두였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보았다. 빨간 모자를 쓰고 호두나무 가지를 바싹 껴안고 있는 새를. 그런데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새가 호두나무 열매를 파먹고 있다니. 호도 알맹이가 딱딱하게 여물다 보니 ‘딱딱딱’ 호도 깨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열매에 구멍을 뚫는 것은 딱따구리였다. 세상에는 온전한 내 것이 없구나. 이 터는 원래 뭇짐승의 놀이터였으니 함께 나누며 살밖에.
호두나무와 가래나무는 형제 나무라고 한다. 호두는 열매가 둥글고 가래는 길쭉하다. 언뜻 보아서는 구분이 쉽지 않다. 호두는 모양이 복숭아와 비슷하여 ‘오랑캐 나라의 복숭아’라는 뜻의 ‘호도(胡桃)’라고 불렸다. ‘고려사’에는 ‘추자 밭을 떼어 백성들이 경작하도록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가래나무의 한자 이름이 ‘추자(楸子)’이다. 열매가 흙을 파는 농기구인 뾰족한 가래와 닮았다고 하여 ‘가래추(楸)’가 붙여졌다.
호두를 얘기할 때면 우선 천안을 떠올린다. 고려 말에 원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유청신(柳淸臣)이 호두를 가지고 와서 그의 고향인 천안시 광덕면에 심었다. 우리나라 호두 재배의 시초라고 전한다.
‘동의보감’에 ‘호두는 몸을 튼튼하게 하며, 피부를 윤택하게 하고, 머리털을 검게 하며, 기혈(氣血)을 보하고, 하초(下焦) 명문(命門)을 보한다’라고 하였다. 호두는 신(腎) 폐(肺)경으로 들어간다. 허파를 따뜻하게 하여 기운을 돋우어 천식을 멈추게 하는 효과가 있다. 호두는 정기가 허해서 속이 찬 사람에게는 좋으나, 담으로 열이 있는 사람은 많이 먹지 않도록 한다.
외국에서도 호두는 ‘신(神)이 내린 선물’이라고 불린다. 우리나라 결혼식 폐백에 밤과 대추를 신부 치맛자락에 던져주듯이, 로마에서는 호두를 그릇에 담아서 신부에게 주었다. 그 역시 자손을 많이 낳기를 기원하는 풍습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호두의 모양이 사람의 뇌를 닮았다고 하여 머리 치료에 사용했다. 또한 호두가 고환과 닮았다고 하여 정력제로 쓰였다. 중국 청조 때 서태후는 미모 유지를 위해 호두죽을 즐겼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호두에는 오메가3가 다량 함유되어 있다.
정월대보름이다. 오곡밥에 귀밝이술을 마시고, 부럼을 깨물어보자. 아름다운 풍속은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문화이다. ‘호두와 밤을 깨무는 것은 바가지를 깨는 것처럼 종기의 약한 부분을 깨물어 부숴버리는 것이다. 신령의 소리를 흉내 내 솜씨 좋은 의사가 침을 놓는 것이라는 주문을 외우며 깨문다’-‘김려’의 ‘담정유고(潭庭遺藁)’
올 한해도 무탈하기를 바라며 정월대보름 부럼을 장만한다. 딱따구리가 먹다가 남긴 호두를 졸인다.
Tip: 후두는 노인 변비에는 좋으나, 다량 섭취 시 설사를 유발할 수 있다. 호두의 씁쓸한 맛을 곶감의 단맛이 보완해 주고, 곶감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변비를 호두가 완화해 주니 호두와 곶감으로 말이를 하면 환상궁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