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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무 Apr 29. 2024

나는 여전히 아프다.

나의 공황의 시작은 학교 일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나는 타인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나의 대화가 타인에게 도움이 되거나 즐거움이 된다면 힘이 난다. 특히 일대일 만남이나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 속에서 나는 소속감과 인정 욕구를 종종 느끼곤 한다. 대화에서 공적 대화와 사적 대화가 있다면, 나는 타인과 사적 대화를 나누는 것에 거리낌을 느끼지 않으며, 타인 역시 자연스럽게 나와 대화하며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곤 한다. 그 대화를 통해서 내적 친밀감을 느끼며 나는 사람들과 공감하며 소통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다수에게 보여주는 글에서는 나는 정제된 글을 쓴다. 아주 사적인 나의 영역을 보여주지 않는다. 혹시나 나를 아는 이가 있을까 봐 하는 노파심과 함께 글을 최대한 간결하게 쓰고 다듬고자 한다. 그래서 글이 나인 것 같으면서도 나가 아닌 것 같은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는 부분만 보여주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치유가 가장 큰 이유다. 글을 통해서 나를 돌아보며, 나를 치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6회 차까지 글을 본다면 나는 늘 완벽하다. 사실은 그 사이 생략된 '울고불고', '미친년과 같이 통제되지 않는 나의 내적 갈등', '남편과의 갈등', '가까운 이들과의 갈등'은 다 없다. 그리고 마치 인스타그램에 올려놓는 세팅된 사진들만 올려놓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덜 정제된 글을 쓰고자 한다. 좀 더 솔직한 글을 써 보고자 한다.



나의 공황의 시작은 학교 일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기간제 교사라는 신분으로 학생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거나, 동 교과 선생님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일들이 쌓이면서 어느 날 모의고사 감독을 보며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에 놓인 나를 발견했다. 그때는 단순한 공황발작 정도였다.

나의 공황장애의 시작은 사립 고등학교에서 관리자의 갑질로부터 시작되었다. 3월 새 학기 시작, 전 교사가 함께 쓰는 교무실, 마치 파놉티콘 구조와 같은 정가운데 위치한 관리자의 자리, 담임임에도 학생과의 상담을 눈치 보며 해야 했고, 옆 교사와의 대화는 삼갔으며, 출퇴근 시간 인사하는 것조차 눈치를 보며 관리자의 기분에 따라 교무실의 분위기가 결정되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제일 충격을 받은 건 3월 야간자율학습 감독 시간에 감독 교사는 교무실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내가 맡은 업무 때문에 야자 감독 중간에 교무실에 와서 일처리를 했어야 했다. 그때 관리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오늘 야자 감독이 누구죠?"

라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마치 무언가 잘못해서 훈육받는 학생보다 못한 존재로 느끼며, 그 수치심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야자 감독이 나라고 이야기하며 왜 교무실에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일처리 후 바로 교무실을 나갔다. 컴컴한 복도를 지나 불 켜진 교실들 사이 복도에서 나는 벌을 받는 것보다 더한 수치심을 느꼈다. 저녁 9시 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미친 듯이 울었다. 그 사건이 나의 목을 조여 오는 듯한 숨 막힘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학교에서 1년이 다 되어 갈 때쯤 나의 병을 알게 되었고 여전히 약을 먹고 있다.


 "약은 나의 불안이나 증상을 완화시켜 주는 거지 나를 치유해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정신과 의사 선생님에게 이야기하며 상담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혹시 아는 상담 선생님이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하지만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소개해 주지는 못하시고 상담이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마침 나랑 근무했던 선생님이 그 관리자의 갑질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상담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의 소개로 나도 상담을 시작했다. 그게 나의 상담의 시작이었다. 반년이 넘는 상담을 통해서 나는 나를 객관화하고 나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약도 줄여나갔다. 지금은 상담을 받지 않지만 여전히 힘든 일이나 공황 증상이 나타날 때면 나는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며 상담 선생님이라면 지금 나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짐작하며 지내고 있다.


그런데 저번 주 나는 아주 급하게 병원을 찾았다. 다니는 병원이 아닌 학교 근처의 병원. 학부모와 전화 상담을 끝내고 감정을 통제할 수 없어서 수업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울었다. 한 시간 넘게 울고, 교감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고 병조퇴를 했다. 그리고 같은 연구실을 쓰는 선생님이 예약해 준 병원으로 가서 평소보다 먹는 약보다 더 센 약을 처방을 받으며 나의 증상이 좋지 못하다며 일주일 후 진료 날짜를 다시 잡았다. 그리고 나는 이번주부터 다시 상담을 받기로 시작했다.


그날 나는 출근 길이 무척 좋았다.

학교에 자주 결석하는 녀석과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그 친구를 어떻게 위로할지, 다독일지 오늘 하루는 또 얼마나 바쁠지 이것저것 생각하며 간 학교였다.

늘 학교에 일찍 도착하는 나는 어느 학부모의 전화를 받았고 그 15분간의 전화는 그간 받았던 갑질 민원 전화들과 함께 기폭제 역할이 되어 나를 그 자리에 앉아 있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원한다면 교권보호위원회를 열 수 있다는 관리자의 말을 듣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이제껏 치유되어 간다며 좋아했고, 그런 나의 모습을 나누고 싶어 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치유의 과정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나는 여전히 아프다. 그리고 그 아픔을 글로 쓰고 치료받고 상담하는 과정에서 내가 치유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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