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직업, 외모, 그리고 다시 남자
사람들이 모이면 하는 얘기는 결국 비슷하다. 먹고사는 문제.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그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전부 여자라는 것 정도다.
오늘은 늦잠을 잤다. 어제 너무 피곤했던 건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이 두려웠던 건지 모르겠다.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부엌 옆 방이라 룸메이트 둘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미래 이야기’였다.
한국인 룸메이트는 호텔 매니지먼트 전공으로 졸업했지만, 요즘은 헬스케어 쪽이 수요가 많다는 얘기를 하면서도 “내 성향이랑은 영 안 맞는 것 같아”라며 한숨을 쉬었다. 한국인 회사에서 일하는 건 싫지만 인터뷰 제안이 와서 준비는 한다고 했다. 그러다 “도대체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꼭 영주권이 필요한 걸까?”라고 중얼거리듯 말하며 “넌 인생을 즐기는 것 같아서 부럽다”라고 덧붙였다. 타이완 룸메이트는 조용히 듣기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완 룸메이트는 원래 파이낸스를 공부하고 선생님으로 일했지만, 지금은 유아교육(ECE)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빅토리아에서 취업이 이미 정해져서 2월까지만 이 집에 산다고. 사회복지에도 관심이 있다며 “사회복지는 멘털이 진짜 세야 돼. 결국 자기 성향이랑 맞는 걸 찾는 게 제일 어렵더라”라는 말을 덧붙였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일’과 ‘먹고사는 일’로 이어졌다. 한국 룸메이트가 집에 있는 걸 좋아한다니까 타이완 룸메이트가 “그럼 글 써보는 건 어때?”라고 했다. “글 써서 어떻게 돈 벌어?”라며 웃으면서도 관심은 있는 눈치였다. 여행하면서 유튜브를 하는 친구 얘기도 나왔는데, 그 친구는 집안이 부유해 먹고사는 걱정이 없는 경우라고 했다. 한국 룸메이트는 “나도 돈 많으면 그렇게 살고 싶다”면서 농담처럼 웃었고, 음악 유튜브 얘기가 나오자 “그럼 노래 불러서 올려봐”라는 말도 오갔다. 방에서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났다.
사실 이 집에 사는 애들도 다 안다. 캐나다에서 안정적인 직업이라 불리는 건 의료, 유아교육, 컴퓨터 세 가지뿐이라는 걸. 하고 싶은 일은 재능이 있어야 하고, 재능이 없으면 돈이 안 된다. 돈 되는 일은 대부분 현실적이다. 그게 참 아이러니다.
대화를 안 듣고 싶어도 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 더 귀가 갔다. 아마 한국 룸메이트의 한숨이 내 마음과 겹쳐서였을 거다. 대화가 끝나고 타이완 룸메이트는 아르바이트하러 나갔고, 한국 룸메이트는 방으로 들어갔다.
소심한 내가 조심스레 부엌으로 나와보니 테이블 위에 취업센터 책자가 놓여 있었다. 어제 셋이 모여서 취업 얘기를 했던 흔적 같았다. 책자 위에 덜 마른 커피 자국 하나가 오늘의 풍경을 완성하고 있었다.
캐나다에서 국제학생들이 걷는 길은 대체로 비슷하다.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다니고, 졸업 후에는 직장을 찾아 영주권까지 이어가는 순서. 지금 내가 사는 집의 룸메이트들도 그 길목에 서 있다. 졸업을 앞두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취업 준비를 하거나, 이미 졸업 후 일을 찾는 중이다.
전공과 관련된 직장에서 커리어를 쌓아 영주권을 받으면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전혀 다른 길을 택해 영주권을 스폰해 주는 회사로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결국 느끼는 건,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내가 붙잡고 있는 고민들도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 셋이 모이면 대화 주제는 대부분 정해져 있다. 남자 이야기, 직업 이야기, 그리고 외모 이야기.
가끔 지인이 어느 회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묘하다. 내 상황에 비춰 ‘나는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러다 또 깨닫는다. 사는 게 다 비슷하고, 결국 태어나서 일하다 죽는 거라면 이 길도 틀린 건 아니라고.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괜히 자신감이 생긴다.
쓸모 있는 사람은 없고, 쓸모 있는 직업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방을 나섰다. 시내 쪽 마켓으로 걸어가며 필요한 걸 사야겠다. 이렇게 또 하루가 이어진다.
동네를 걷다 보니 제법 규모 있는 헬스케어 센터가 눈에 들어왔다. 캐나다는 역시 헬스케어 분야의 수요가 많다더니, 이곳도 간병인을 비롯해 다양한 인력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듯했다. 간판에 적힌 안내문을 보니, 이 센터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바로 현장으로 취업 알선해 주는 것 같았다.
이 근처에서 새로 자리 잡는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이곳이 또 다른 시작점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