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는 했지만
결국 지금 일하던 곳에서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디렉터 신디와 면담을 나눈 끝에, 그녀가 나를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게 확 느껴졌다. 이미 오래 일한 시니어 직원의 눈 밖에 난 상태였고, 멀리서까지 출근할 만큼의 동기부여도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오리엔테이션을 한 번 더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받았지만, 아쉽지만 그만두겠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쪽에서도 담담하게, 그러나 흔쾌히 내 결정을 받아들였다.
며칠 후, 리치먼드에 있는 시설에 이력서를 보냈다. 그리고 이틀도 안 되어 연락이 왔다. 정말 바로 다음날이었다.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Nir의 말이 맞았던 건지.
면접 날짜를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집을 보러 다니는 일정이랑 겹쳐서 두 번이나 시간을 바꾼 끝에 겨우 확정했다. 어제 연락이 온 곳의 필리핀계 LPN 케이스 매니저가 서류 리스트를 메일로 보내줬다. 범죄기록 확인서만 빼고는 다 준비했고, 혹시 몰라 미리 파일을 첨부해 메일로 보내놨다. 또 깜빡할까 봐.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면접 날짜까지 정해졌는데, 마음 한쪽이 계속 덜컥거렸다. 결국 저녁에 Nir에게 연락해서 면접이 어땠는지 이것저것 물어봤다. Nir은 자기가 일하는 다른 곳은 그룹 인터뷰였다고 했다. 여섯 명 중 두 명을 뽑았고, 입사까지는 2주 걸렸다고.
“근데 리치먼드는?”
“거긴 바로 채용됐어.”
그 말을 듣자 지금 일하던 곳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랬다. 면접 본 당일, 바로 “언제부터 일할 수 있냐”는 말이 나왔다. 이번에도 뭔가 느낌이 비슷했다. 이상하게 잘 될 것 같은 예감.
면접관 이름을 검색해 보니 역시 필리핀계였다. 괜히 마음이 조금 놓였다. 필리핀 사람들은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경우가 많고, 나는 또 비교적 어린 편이라 왠지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그때처럼, 면접 날엔 한국 과자 하나 챙겨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에 오는 길에 한국 슈퍼마켓에 들러 몽쉘통통 한 박스를 사 두었다. 혹시 한국 음식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작은 디테일 하나가 분위기를 바꾸기도 하니까.
제발, 이번에도 잘 되었으면 좋겠다.
요즘 들어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실감한다.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는 조급하게 무언가를 바라기보다, 한 걸음 물러서 제3자의 시선으로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담담히 지켜본다.
그게 결국 얇고 길게, 오래 가는 길이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