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On <나는 시골언니다>
뜨거운 여름이 거의 지나고 조금씩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던 9월, 갑작스러운 전화가 한 통 걸려왔습니다.
재미있는 아이템이 있는데
너희가 맡아보면 어떨까 싶은데?
연말이 되면 영상 제작업체들은 유난히 바빠집니다. 아무래도 한해의 예산을 다 쓰지 못했을 때 생각하는 좋은 선택지가 영상콘텐츠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죠.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도 그래서 들어온 일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연말까지 앞으로 할 일이 적지 않다 생각하는 시기에 사수이신 피디님께 온 연락이었어요. 사실,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답은 '못. 할. 것. 같. 아. 요.'였습니다. 시간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뭐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NO’를 말하기 이전에 불쑥 질문이 먼저 나왔습니다.
어떤 아이템인데요?
그렇게 전달받은 다큐멘터리의 소재는 <시골언니 프로젝트>였습니다. 농촌에 정착한 청년 여성들이 탈도시 라이프를 탐색하는 또래들을 만나 '시골언니'라는 인맥을 만드는 프로젝트. 연고가 없는 시골에 쉽게 정착할 수 있도록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어주는 캠프였습니다. 그리고 40일 정도 후에 방송을 내야 하는 엄청 급히 진행해야 하는 프로그램이라는 말까지 해주셨어요.
듣자마자 끌림이 있었어요. 원래부터 관심이 있었고, 그 관심이 최근 더 깊어지고 있던 주제였거든요. 그래서 약간의 무리를 무릅쓰고라도 해야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대답을 했던 게 9월 13일이었어요. 그리고 10월 1일... 보름 남짓한 시간에 답사부터 촬영까지 모두 마무리했습니다.
상주와 제천에서 시골언니 프로젝트에 온 친구들을 만나기 전 일상의 모습들과 시골언니 프로젝트를 하러 온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교감을 나누는 모습들을 담았습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들은 불청객일 수 있었어요. 우선 여성들만 모인 공간에 시꺼먼 남자들이 있는 것도 불편할 수 있겠다 싶었고, 어찌 되었건 진행해야 하는 일정들이 있는데 우리들은 끊임없이 끼어들어야 하고, 질문을 던져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누군가에겐 불편한 불청객인 게 우리 같은 제작진들이죠. 하지만 기꺼이 시간과 자신들의 공간, 그리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내어주는 분들 덕분에 우리가 채워가야 할 내용들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도시에서 온 언니들은 마을에 있는 주민들에게 목공도 배우고, 시골 사는 이야기도 듣고, 여러 가지 실제 농사짓는 곳에서 일손도 거들고 하며 시골 살이를 경험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스몰토크부터 진솔한 속얘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었죠.
이미 먼저 시골에 와 정착한 시골 언니들도 도시에서 찾아온 도시 언니들도 자기만의 이야기와 속내들을 많이들 꺼내놓아 주었습니다. 다들 비슷한 고민들이 있었어요. 복잡하고 도시에서 같은 방향으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에 조금은 지친 사람들. 그리고 그 고민과 질문 속에는 나의 고민과 질문도 있었습니다. 차도 사람도 엄청 많고 시끄러운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보냈던 11일간의 시간. 시골의 한적함과 탁 트인 시야, 밤마다 보이던 별들은 때로는 일이라기보단 힐링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에 필요한 한 가지를 찾아 이곳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촬영을 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상주에 들른 날. 도시에서 왔던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가고 시골언니 둘이 남아 공간들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벽에 붙어 있는 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번에 있던 친구들이 집에 가기 전에 써주고 간 글들이라고 했죠.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어보고 있는데 한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고향이 없던 저에게 고향이 생긴 기분이에요
마음이 번잡할 때, 도시의 회색빛이 지루해질 때, 푸른 녹음과 아름다운 별빛을 보러 찾아갈 만한 곳.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라 도시에서 어른으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게 너무나 당연해지는 시대에 그렇게 언제든 찾아갈 시골이 생긴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로운 고향에서 만난 이야기들을
예쁘게, 가치 있게, 다듬어 편집했습니다. 다시 그들에게 돌아갔을 때, 지금 만드는 이 프로그램이 선물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에게도 ‘마음 둘 곳’이 되어준 모든 분들을 위해서 말이죠!
와! 한 달도 안 지났어요!
편집을 딱 마치고 나서 컴퓨터 날짜를 보고 처음 외쳤던 말입니다. 첫 촬영이 9월 19일, 편집이 마무리된 날짜가 10월 18일. 그리고 10월 23일 방송! 50분짜리 방송을 이 정도 시간만에 소위 '말아' 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가장 편안한 여행을 꿈꾸며 그곳을 찾았을 참여자분들께, 그리고 정해진 일정들을 조금씩이나마 우리를 위해 조정해 주고 함께 애써준 시골언니들에게 불청객일 수밖에 없는 우릴 환대해 줘서 정말 고마웠다고 다시 한번 말하고 싶네요.
그때 만난 모든 친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의 일상을 살고 있어요. 한 친구는 그때 고민하던 직업 군인이 되었고, 한 친구는 서울에서 연극에 출연 중이죠. 한 친구는 세계를 돌고 있고요. 각자 자신의 일상을 살며 가끔은 고될 때, 가끔은 반복되는 일상이 무료할 때, 이 '고향'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 우리 다큐멘터리도 자리하고 있길... 바라봅니다.
다큐멘터리 피디로서의 자부심이자 일종의 믿음이 하나 있는데요.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지나가버렸을 어떤 순간들이 생생한 영상 기록으로, 그때의 생각을 담은 인터뷰로, 그것들이 구성되어 정리된 하나의 이야기로 ‘남겨지는 것’은 분명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기꺼이 내어준 그분들에게 의미 있는 일이 될 거란 믿음이에요. 그리고 고맙게도 이 다큐멘터리는 정말 그분들에게도 좋은 기억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고, 지금도 언제든 편하게 찾아갈 곳이 되어주었어요.
지금도 우리 가족들의 시골집에 갈 때, 그리 멀지 않은 상주에도 종종 함께 찾아갑니다. 상주에 있는 달두개학교의 고양이 봄이는 딸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고양이가 되었어요.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의 가족들에게도 좋은 사람들을 소개해주고, 또 그들이 관계를 맺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게 다큐멘터리 피디로 살아가는 가장 큰 기쁨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음 둘 곳이 되어준 고마운 고향이 되었습니다.
KBS 다큐On <나는 시골언니다> 편 다시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un3lCgnQ8zQ&t=204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