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On <빈집, 가능성을 채우다>
2022년 만들었던 '시골언니 프로젝트'에 이어 2023년 봄에 한번 더 다큐온을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다루게 되었던 주제는 '폐가의 변신'.
급격하게 이뤄지고 있는 지역 소멸과 함께 지방의 노인분들이 돌아가시면서 주인의 돌봄 없이 방치된 빈 집들은 많은 지자체들의, 지역 주민들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인기척이 사라진 건물들은 수풀과 덩굴이 자라나 빠르게 동네의, 골목의 흉물이 되고 있죠. 반대로, 도시에서는 떨어지고 있다고도 하지만 여전히 높은 집값으로 또한 골치죠. 거기에 지나치게 경쟁적인 사회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적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멘털적인 이유로, 또는 기회를 잡고자 시골 생활을 선택하는 이들이 또한 늘고 있다고 해요.
도시의 사람들은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하고
지방소도시에는 ‘빈 공간’이 넘쳐납니다.
이런 두 개의 결핍이 서로를 채워주고 있는 사례들을 찾아가 봤습니다. 그 비어있는 공간을 새롭게 만들어 자신의 삶에도, 마을의 분위기에도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 지방의 폐가를 리모델링하며 5도 2촌의 거점을 만들고 있는 분, 2) 200살 된 폐가를 고쳐 지방에 정착한 한 부부, 3) 요양차 내려간 지방 소도시에 빈집을 고쳐 카페를 열고 청년들이 지방에 남을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는 분까지! 빈 집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게 하는 공간이 되어주고 있었습니다. 주말에 가는 나만의 힐링하우스로, 온전한 삶의 보금자리로, 그리고 나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상업의 공간으로 다양하게 지방의 빈 집이 활용되고 있는 사례들을 찾아갔습니다.
처음으로 간 곳은 충청남도 금산군. 굽이굽이 산길을 지나 만난 마을에서도 한 골목의 제일 끝에 위치한 빨간 지붕이 예쁜 집이었습니다. 출연자 분은 20년간 유명 카페 프랜차이즈에서 일하다 나만의 것을, 내 손으로 만드는 것에 즐거움과 꿈이 생겨서 직전 해에 퇴사를 하고 4개월째 폐가를 셀프 리모델링하고 있는 박소연 님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낭만적인 시골 생활이 꿈일 수 있겠지만, 꽤나 치열한 준비의 시간을 또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목공을 주말마다 배워왔고, 시간이 될 때는 건축 현장에 가서 어깨너머로 미장 기술도 배워뒀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이 쌓여 '맨끝집'이라고 명명한 집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꽤나 고단해 보이고 피곤할 법한 일이건만 이 모든 일은 그동안 잘 견뎌내며 살아온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고 해요. 수십 년간 묵은 나무의 때를 벗겨내며 점점 더 진짜 ‘나’에 대해 발견해 간다는 소연 님. 그리고 이 집에 켜켜이 쌓여있는 시간의 흔적들이 너무 좋다고 했어요. 이 집에서 발견되었던 고장 난 오디오는 전문가의 손길을 거쳐 다시 맨끝집으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리모델링의 과정을 거의 마무리하고 방 난간에 앉아 맨끝집의 유물과 같은 오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는 소연 님의 모습은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과 함께 참 여유롭게 느껴졌습니다. 카메라에 담겼던 그 표정의 여운이 잘 잊히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추억이 쌓였지만 사람의 온기를 잃고 비어버렸던 폐가는 스스로를 찾아가는 새로운 가능성의 집이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찾아갔던 곳은 전라남도 강진군의 한 마을. 네덜란드 선교사 하멜이 머물렀다는 이 마을은 네덜란드식 돌담이 마을길 양쪽에 아름답게 쌓여 있는, 걷기 참 좋은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길에 주로 보이는 모습은 보행보조기에 몸을 기댄 할머니와 무릎이 아파 절뚝이며 걸어가는 할아버지들이었죠. 이 아름다운 마을에도 계속 생겨나는 빈 집들 때문에 고민을 가지고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 한 젊은 부부가 이사를 왔습니다. 그것도 200년 된 집에 말이죠. 고택은 젊은 부부의 손때가 묻어 더 예쁜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이 집의 가장, 장성현 님은 자신이 정착한 이 아름다운 마을이 다시 사람들이 북적이는 마을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읍내의 청년들도 만나 네트워크를 만들고, 자신의 집을 내어 주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갔죠. 장소가 있고 '거리'가 있으면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믿음으로 말이죠.
그리고 또 한 쌍의 젊은 부부가 성현 님의 집 바로 인근의 빈집을 매입해 입주를 위해 리모델링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공사가 들어간 빈 집. 마을에 사시는 어르신들이 젊은 부부가 온 걸 반기며 공사가 한창인 집에 찾아오셔서 말을 건네십니다.
외국에서 타향살이를 하다가 돌아온 한 부부의 노력이 200년 된 폐가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고, 지역의 젊은이들이 언제든 찾아와 시골살이를 경험해 볼 모델하우스가 되어줬습니다. 어른들은 젊은이가 왔다는 그 단순한 이유만으로도 눈웃음 지으셨습니다. 지방의 마을은 젊은이를 필요로 하고, 그런 젊은이들에게 이런 빈집은 가능성을 열어주는 공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충청북도 충주시. 옛 관아 건물이 동네 정중앙에 자리하고 있고, 한때는 시 우체국이 있던 도시의 중심이었던 곳. 시골뿐만 아니라, 지방의 소도시들도 지방 소멸의 위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도심이 다른 동으로 옮겨가면서 점점 슬럼화되고 있던 관아골의 한 좁은 골목길, 이 골목은 한때 고등학생들이 몰래 숨어 담배를 피우는 걸로 유명한 담배골목이었다고 합니다. 이번 주인공은 이 골목에서 만나게 되었는데요.
이 좁은 골목에 밤만 되면 등대처럼 불이 들어와 있는 한 카페가 있습니다. 세은, 상창 부부의 카페인데요. 두 사람의 이름을 따 '세상상회'라는 이름을 갖게 된 곳입니다. 상창 님은 암이란 병마와 싸웠던 분입니다. 병을 치료하면서 요양도 하며 지내기 위해 내려온 이곳에서 운명처럼 골목에 위치한 폐가를 만났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적산가옥과 한국식 근대 가옥이 한 울타리 안에 있던 집. 그곳에 부부는 자신들의 인생 2막을 만들어 갈 카페를 열었습니다.
이 카페의 아르바이트생들은 특별한 호칭이 있어요.
'알바요정'
아르바이트하는 분들도 다 상창 님이 오는 손님들을 눈여겨봤다가 직접 섭외를 했다고 해요. 그리고 이곳에 정착할 마음이 있다고 판단되면 얼마든 함께 고민해 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알바요정 출신으로 이 골목 근처 상권에 정착한 분들도 있죠. 그렇게 창업 인큐베이터 역할까지 하며 골목에 활기를 불어넣는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현재는 한국의 로컬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이야기되는 대표적인 지역이 되었답니다.
이곳이 가진 정취를 고스란히 살리면서
볼만한 거리들을 제공했을 때는
또 하나의 따뜻한 공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하고 있어요.
- 이상창 님 인터뷰 중 -
지방에는 많은 기회와 가능성이 있고, 오래된 시간의 흔적과 가치를 가진, 지금은 비었으나 많은 가능성을 가진 공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건 결국, 사람이었어요. 누군가는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누군가는 우리의 세워짐을 위해, 누군가는 지역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 위해 그 가능성의 공간에 자신의 꿈을 채워가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만난 빈집들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했죠. 편집을 위해 예전 사진들을 보면 어떻게 이 건물이 지금처럼 바뀔 수 있었을까 신기하고, 한편으론 경이롭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출연자들은 하나 같이 말했습니다.
빈집이어서 좋았어요
사람이 살던 곳이라 가치 있다 생각했어요
이 안에서 느껴지는 아늑함이 전달되는 것 같아요
빈집이었기에, 거기 쌓여있는 흔적들이 남아 있었기에, 지금 자신에게 건네는 메시지들이, 힌트가 있었단 겁니다. 그렇게 빈 집은 누군가의 꿈과 만나 새로운 가능성을 가득 채운 공간이 되었습니다.
KBS 다큐On <빈집, 가능성을 채우다> 편 다시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YOj5B5b06JM&t=2546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