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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욱곤 Apr 16. 2024

꼬까신

어른이 되고 난 후의 내 꼬까신은?

(이미지출처:알라딘) 글의 느낌과 잘 맞아요.^^



요즘이야 초봄 꽃을 기다릴 때마다 각각의 머리에는 다른 꽃들이 그 자리를 하겠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봄꽃의 신호탄은 누가 뭐래도 개나리입니다. 시내를 조금 벗어나 동산 이상에나 자리 잡던 진달래와는 달리 개나리는 담장이나 마을 어귀 등등에 그 색깔도 노랗게 자태를 뽐내던 나무였습니다.     


어제, 오늘 어릴 적 부르던 동요 하나가 내내 입가를 맴돕니다.      

                  개나리 노란 꽃그늘 아래

                  가지런히 놓여 있는 꼬까신 하나

                  아기는 사알짝 신 벗어놓고

                  맨발로 한들한들 나들이 간다.

                  가지런히 기다리는 꼬까신 하나.     


아마도 제목이 꼬까신일 텐데 요즘 같은 봄날이면 꼬까신보다는 개나리에 더 마음이 쓰일 게 분명합니다. 드디어 바깥나들이가 그다지 버겁지 않을 봄날에 아이는 무엇을 찾으러 꼬까신까지 벗어두고 나들이에 나섰을까요? 문득 그것이 궁금해질 때 다시 하나 궁금해지는 건 꽃그늘을 왜 노란 꽃그늘로 표현했을까요? 하기야, 꽃그늘은 노랑이 될 수 없어. 그냥 검을 뿐이지! 이렇게 현상을 정확하게 짚어내 봤자 나이 먹은 아재라는 소리나 듣기 십상입니다. 그냥 까만 꽃그늘이 아니라 노란 꽃그늘이 맞는 말입니다.          


어릴 적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기 시작할 무렵, 주변을 당당하게 바라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대부분 땅만 바라보며 걷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 봤자 채 10살도 안 되던 그 시절, 햇살 좋은 봄볕 하나 느끼지 못하고 내 그림자조차 제대로 밟지 못하던 소심함만 가득한 채, 학교도 가고 하교(下校)도 하던 그런 시절 말입니다. 그때의 색깔은 어두운 색깔의 꽃그늘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고개를 들고 좌우로 시선을 돌리면 여러 색깔이 나를 둘러싸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그 시기에 그런 호사를 잠깐이나마 누려보질 못했습니다.
 
 

땅에 뚫린 구멍을 보고 봄이 왔음을 느낄 게 아니라 쑥과 제비꽃과 민들레를 보는 눈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미 떨어져 버린 벚꽃잎으로 이미 봄이 왔음을 느낄 일도 아닙니다. 나의 어린 시절은 해맑은 친구들 덕분에 많이 밝아졌습니다. 뛰어다니고 같이 집에 오고 집에서 숙제도 같이하고 그것도 모자라 다시 집 밖으로 불러내던 그런 친구들 덕에 내 어린 시절은 여태껏 꽃입니다.
 
 

오늘은 퇴근길에 노랑과 초록이 묘하게 어우러져 예쁘디예쁜 개나리를 쓰다듬어 주고 집에 들어가야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 노랑도 잠시 잠깐일 뿐이요, 조금 지나면 이파리의 초록 색깔에 그 자리를 내어줄 게 분명합니다. 세월이 지나면 초록색들도 그 노란 꽃그늘을 그리워하겠지요? 내년에 다시 피울 꽃잎을 그리다가 파랗게 파랗게 물들어 가겠지요? 내 어릴 적 벗어 논 꼬까신은 벗어놓은 그 자리에 잘 자리하고 있을지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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