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나와 물만 있는 그곳
어렸을 때, 귀를 손바닥으로 꽉 막으면 나는 그 소리가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라는 그 말을 꽤 오랫동안 믿었다. 그래서 자주 귀를 막고서 지구에 살고 있는 한 생명체로써 나를 품어주는 이 땅과 교감을 하곤 했다. 이제는 다 큰 어른이 되어 지구의 자전을 굳이 느끼려 하진 않지만 여전히 지금도 우주가, 지구가, 참 신기하고 생경하게 느껴진다. 특히 하늘과 바다를 볼 때 더욱 그렇다.
파란 하늘에 벅차게 펼쳐진 흰 뭉게구름을 보며, 저 먼 곳에서부터 몰아치는 짙은 남색의 바다를 보며, 새삼 '와 이게 정말 우주에서 딱 여기에만 있다고?' 싶다. 그럴 때마다 내 존재 자체가 낯설어지면서 또 동시에 아주 제대로 실감 난다. 이곳에 두 발 딛고 살고 있구나.
수영을 할 때 처음 딱 물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 비슷한 감정이 느껴진다. 온 오감으로 내 존재만이 뚜렷이 인식된다. 먼저 주의를 흩트리던 소음이 사라진다. 귓속 가득 물이 차며 어릴 적 교감했던 그 지구의 자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눈앞도 그저 일렁거리는 물과 수영장 타일만이 있다. 한 번씩 사람들 다리가 보이긴 하나 그들 또한 수영 중이기에 이내 곧 사라진다. 손으로 물잡이를 하며 물 덩어리를 당긴다. 평영 발차기를 하며 두 발 틈새로 빠져나가는 물줄기를 느낀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오직 물뿐. 그렇게 수영장 속에서 온전히 나만 존재하는 우주를 만난다.
회사가 유독 힘들게 하는 날이 있다. 그날도 그랬다. 신규 프로젝트 Kick-off를 앞두고 챙겨야 할 현안들이 많아 퇴근하고서도 머릿속에 일 생각이 가득했다. 원래 퇴근과 동시에 Work Switch를 꺼버리는 편인데 그날은 도통 이 걱정 저 걱정 떠나질 않아 속이 답답했다. 그 와중에 가장 간절했던 것이 수영이다.
수영으로 세상과 잠시나마 단절되면 이 생각의 고리도 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절실한 마음으로 수영장에 입성했다.
풍덩 -
정말이지 정신없이 수영하는 동안 일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귀를 가득 채우는 그 물소리에 커다란 안정감을 느꼈다. 드디어 나의 작은 우주에 들어온 것이다. 이곳에서는 아무 걱정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저 팔을 돌리고 발차기를 하며 물과 교감했다. 사실 그날은 오히려 몸이 무거운 탓에 수영이 잘 되진 않았다. 한 바퀴 두 바퀴 돌 때마다 숨을 몰아쉬느라 심하게 헐떡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 크게 오르락내리락거리던 가슴팍이 여전히 또렷하다. 얼마나 집중해서 물을 헤치고 나아갔으면 그랬을까 싶다. 그렇게 더부룩하게 꽉 차 있던 잡념을 물에 녹여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은 오랜만의 온전한 Switch off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