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한 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불 속에서 가녀린 다리가 펄럭거렸다. 나는 나의 눈이 말똥말똥하단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나는 이럴 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커튼을 걷었다. 별 하나 없는 하늘에, 크고 둥근 달이 나의 침실로 널따랗게 빛을 내리고 있었다.
“잠이 안 와.”
저렇게 핑계를 댄 나지만, 나는 다시 누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나는 오히려 잠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창을 여니 밤바람이 들어왔다. 넓고도 풍요로운 바람이었다. 좋은 기분을 자아내는 온도와 상쾌함, 영원한 평화를 말하는 듯한 고요함과 지저귐. 나는 침대맡으로 되돌아와 담배와 라이터를 챙겼다. 핑-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붙었다.
“후…”
담배의 맛은 떫다. 그러나 나는 이 떫음이 미래의 어른스러움을 느끼게 해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맛있다.”
나는 창을 닫아, 얼른 증거를 숨겼다. 그리고 시계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정부가 문을 두드릴 때까지 3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침대에 몸을 눕히면 금방 잠에 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고지식한 소년이다. 그렇기에 나의 걸음은 침대를 향해 가지 않았다.
“이렇게 된 거, 한번 나가 볼까.”
그리고 나는 불씨를 꺼트린 담배꽁초를 침대 아래로 던졌다.
“이전처럼 엘리베이터 입구에서만 잡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옷장을 열어 두꺼운 외투와 신발을 꺼내 들었다. 아, 담배.
“깜빡할 뻔했어!”
나는 담배도 담배이지만, 특히 D라고 적힌 라이터를 아꼈다.
“됐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걸음을 돌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베개를 이불 속으로 집어넣었다. 현관의 유리문이 열리고, 차가운 감촉이 머리 위에 뻗어 있는 손가락에서부터 느껴졌다. 여기서 손을 돌리면 문이 열린다.
-철컥, 문이 열렸다.
이제부턴 전적으로 나에게 달린 일이다. 나의 타고난 날렵함에 대한 믿음,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자신감.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된다. 나는 그날의 굴욕을 잊지 않았다. 고작 몇 걸음 앞의 엘리베이터에서 잡힌 굴욕을, 그리고 며칠간 이어진 외출 금지를. 오늘 나는 치욕스러운 그때의 기억을 깨고자 한다. 왼편의 유리 너머로 밝디밝은 조명들이 보인다. 나는 색이 다른 불빛을 징검다리 삼아 걸음을 디뎠다. 보랏빛을 밟자,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그때부터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신발 위로 내려앉은 보랏빛을 보며 작게 혼잣말했다.
“행운의 여신이시죠? 저를 도와주세요.”
그리고 한 걸음. 양 갈래로 트여 있는 길이 나의 발소리를 흉내 내었다. 발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고약한 놈들. 그러나 나는 지난번을 기억하고 있다. 저 흉내쟁이들이 나를 따라 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들킬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한 번의 긴 울림이 그쳤다. 여기서 나는 고민했다. 고개를 돌려 행운의 여신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고개를 돌리면 누군가가 코앞에 다가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는 고개를 돌리지 못하였다. 내가 떠올린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흉내쟁이들의 소리를 지금처럼 차곡차곡 쌓을 것인가, 단번에 엘리베이터로 달려가 빠르게 1층으로 내려갈 것인가. 그런데, 머릿속으로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배워 본 적도 없는 달리기를 나는 펼치고 있었다. 호흡은 예상외로 균일했다. 다만, 이다지도 복도가 크게 울리는 건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나는 허겁지겁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10층에 머물러 있었다. 한 층이 올라오는 데 3초가 걸렸다. 그러니까 최소한 나는 30초가량을 더 버텨야 한다. 울림이 그쳤다. 나는 가능한 엘리베이터 가까이 등을 기댄 채로 몸을 웅크렸다. 또한 나는 이미 각오를 다져 있었다. 아버지, 가정부, 혹은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면 그대로 뛰어올라 몸통 박치기를 선사할 거라고. 이제 15초. 15초만 버티면 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을 수 있다. 그 짧은 달리기 때문인지 여전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10초…, 5초…, 3초….
됐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베어 물었다. 핑-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나는 담배를 문 입가로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엘리베이터 속으로 뒤 굴렀다. 이제 내겐 1층으로 향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무언갈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뒤로 구를 때의 일이다. 흰색의 긴 물체가 엘리베이터에 서 있었던 것만 같다. 나는 담배를 손가락으로 옮기며 숨을 참았다. 숨을 참으면 내가 본 그 누군가를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엘렌 님.”
언젠가 들어 본 목소리였다. 낯이 익지는 않다. 나는 신발 아래로 슬며시 담배를 끄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 나이에 담배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입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목소리가 누구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이때의 나는 이미 반 이상 포기한 상태였다. 바지와 상의를 털고, 몸을 돌리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F구역으로 가시는 것이지요?”
하얀 옷이다. 나는 머리 좋은 과학자들이 저런 차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맞아.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어.”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내 하얀 옷을 입은 사내가 나에게로 고개를 숙여 왔다.
“…제 이름은 세스. …왕실 내 수석과학자입니다.”
그에 나는 물었다.
“아, 그래? 그럼, 내 아버지와 친한 사이겠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세스는 이어 말을 내뱉었다.
“…지금은 쫓기는 몸이 돼 버렸지만요.”
“왜?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어?”
내 질문을 들은 세스는 팔을 뻗어 숫자 1을 눌렀다.
“…폐하께 거짓말을 했습니다.”
나는 새 담배를 꺼내며 말했다.
“용서를 구하면 되지 않아?”
“…그 정도로 끝날 사안이 아니어서요.”
“사안이 뭔데?”
“…거짓말의 정도가 지나쳤다고 해야 할까요.”
“아버지는 용서해 주실 거야. 그렇게 무서운 분이 아니시거든.”
“…늦었습니다. …이미 엘렌 님의 침실에는 CCTV가 깔려 있어요. …제 서재 또한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합니다.”
나는 세스가 딱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지나칠 뻔한 단어 하나가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F구역이라는 단어이다. 엘리베이터는 멈춤 없이 내려가고 있다. 이제 곧 도착한다.
“F구역이라는 말을 했지, 너?”
세스가 대답했다.
“…예, 엘렌 님.”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담배에 관해 잔소리하지 않았다. 나는 있는 힘껏 담배 연기를 입안에 머금었고, 세스의 얼굴로 뿜어냈다. 세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너도 같은 꿈을 꾸는 거구나? 그렇지?”
세스는 어두운 표정을 이어갈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긍정의 신호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를 누군가에게 배운 적은 없다. 순전히 감이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세스는 나를 향해 먼저 내리라는 손짓을 비췄다.
“세스.”
등 뒤에 선 세스가 대답했다.
“…예.”
“키다리는 어떤 존재인 것 같아?”
세스는 내 말에 대답하기 이전에 1층 로비에 사람이 없는지부터 확인했다. 내 눈에 비친 로비는 썰렁했다. 데스크도 비어 있었고, 입구를 지키고 있어야 할 가더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와 같은 순서로 그 모두를 확인한 세스는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신, 천벌, 우연, 망령. …넷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신이라는 단어에 유독 기분이 쏠렸다. 그와 동시에 나는 텅 빈 로비를 유랑하듯 휘젓고 다니며 말했다.
“신은 없어. 신이 없으니, 천벌도 없어. 우연이라기엔 같은 꿈을 꾸고 있잖아. 망령이 답인 것 같아.”
“…어떤 망령을 말씀하시는 건지.”
나는 떠오르는 대로 냅다 대답했다.
“키다리는 우리를 F구역으로 인도하고 있어. 그러니 분명 F구역의 망령들이 우리네 혈관 속에서 소리치고 있는 걸 거야.”
“…엘렌 님과 제가 F구역 사람들에게 잘못한 게 있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만.”
이번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있어.”
세스는 허리를 굽히며 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게 무엇인지요?”
“그들을 버렸잖아. A구역에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래서 A구역에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DNA가 오래전부터 우리를 저주하고 있었던 거야. 이러면 망령의 대장 격인 키다리가 꿈에 나오는 것도 이해가 돼.”
거기서 세스는 나의 입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나의 눈을 보며 세상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물의 부작용일 뿐입니다.”
“약? 그럴 리가. 나는 부작용이 있는 약을 단 한 알도 먹고 있지 않는걸.”
그와 동시에 우리는 궁의 출입문에 도착했다. 세스의 목소리가 뒤이었다.
“…제가 조제한 주사를 말한 거였습니다.”
나는 조제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충 꿰맞췄다.
“무슨 주사를 만들었는데?”
“…감정, 지능, 수명입니다.”
감정, 지능, 수명.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미완성이지만요.”
“미완성이란 건, 완성하지 못했다는 뜻이야?”
“…예. …모두가 위태롭고, 불확실하죠. …그러나 제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엘렌 님을 그 누구보다 똑똑한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 요청하셨거든요.”
“내 몸엔 지능이 들어갔겠구나?”
세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더니 자신을 가리켰다. 그때 나는 극심한 어지러움을 느꼈으나, 꿈속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얼굴을 손톱으로 세차게 긁었다.
“이해했어.”
“모두 이해했어, 세스.”
“그러니까, 그 주사를 너도 맞은 거야. 그렇지?”
세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다고 쳐. 내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긴 힘들었을 테니까. 그런데, 너는? 너는 그런 위험한 주사를 스스로 맞을 필요가 없지 않아?”
이제 계단이다. 몇 걸음만 내려가면 주민들의 주거지에 발을 붙일 수 있다.
“…최근, 수명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성공률이 높은 감정과 지능 주사와는 달리, 성공률이 현저히 낮았죠. …그래서 제가 만든 지능 주사를 맞아 버렸습니다. …그럼, 실험의 결과가 전보단 나아지지 않을까 스스로 자위하면서요.”
“욕심을 부렸다는 말로 들리는데?”
세스는 소리 내 웃었다.
“…예, 하하. 그 벌로 지금 F구역을 향해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왕자님을 끼고서요.”
“난 네가 있어서 좋아. 든든해. 우린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어떤?”
“꿈속의 키다리, F구역, 네가 실행하고 있는 실험까지. 전부!”
그리고 나는 다 피운 담배를 계단 옆으로 던진 뒤, 말을 이었다.
“그러면 네 억울함도 사라지지 않을까? 주사의 부작용이라는 슬픔에 빠져 있을 필요도 없고 말이야!”
세스는 별 표정 짓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 그가 벅참을 느꼈으리라 속으로 확신했다. 뿌듯한 마음을 지닌 채 걸음을 내딛던 중, 궁과의 거리가 제법 벌어졌을 때, 세스가 입을 열었다.
“…엘렌 님.”
“응!”
“…엘렌 님께선 어떤 꿈을 꾸십니까?”
“키다리가 나오는 꿈은 다 똑같은 꿈 아니었어?”
세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그를 허름한 창고에서 만났습니다.”
“아니, 나는 창고에서 녀석을 만나 보지 못했어. 도로에서의 만남이 처음이야. 그 뒤로는 그곳이 F구역 34번지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말이야. 이것도 계속해서 꿈을 꾸며 모은 정보야.”
“…그러시군요.”
그러다 세스는 나를 보며 물었다.
“…혹시 통조림이라는 물건을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