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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을 내어준 사람들

[10] 그때 그 시절

by 은조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주제를 잡고 글을 쓰려고 보니 그때도 난 전혀 혼자가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그리고 감사하게도 항상 내 곁엔 때에 맞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었고 지켜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등학생이던 그 시절에 우리 옆집엔 작은 외숙모의 동생네 가족이 살게 되었다. 대문 하나에 두 개의 현관문으로 살다 보니 문 밖으로 나오면 10초 거리. 그러니 거의 같이 살고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가족은 부부와 어린 아들 이렇게 세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실 불편하고 거리를 두어야 할 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두 부부는 나를 친조카처럼 정말 살뜰히 챙겨주셨다.


엄마가 항상 늦게 퇴근한다는 것도 그로 인해 나 혼자 집에 있다는 걸 아셨기에 무조건 저녁밥을 먹을 때, 혹여나 외식할 때가 있더라도 절대 나를 빼놓지 않고 챙겨주셨다.


처음엔 감사히 잘 따라다녔지만 횟수가 잦아질수록 점점 나 혼자 눈치를 보게 되었다. 주변 지인들을 만나면 나를 가리키며 누구냐고 묻기 시작했으니


그런 물음들은 나에게 부담으로 다가왔고 그제야 내 상황파악을 하게 되었던 거 같다. 오라고 하니 갔는데 내가 눈치도 없이 선을 넘었구나 하며.. 그 후부턴 밥 먹자고 할 때에도 먹었다고 하거나 엄마가 온다고 했다며 믿기지 않을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면 배는 고팠지만 마음은 편했다. 언제나 나는 마음 편한 게 우선인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저녁, 나의 계속된 핑계를 모를 리 없던 부부는

엄마가 온다는 나의 말에도 얼른 먹고 오자며 나를 데리고 나갔는데 그날도 다른 지인이 있던 것.


역시나 그 지인도 나를 향해 누구냐고 묻는데 아, 진짜 괜히 따라왔다 싶어 후회가 들 찰나에 내가 삼촌이라 부르던 남편분은 ’ 우리 딸이야‘라는 대답을 내놓으셨다


사실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분위기상 더 이상 묻지 말라는 것을 느낀 상대방은 다른 말로 돌리며 이어 나갔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상하게도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내가 불쌍해서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두 분의 진심인 마음이 전달되어서 그랬으리라.


전혀 나를 챙겨주고 위해줄 이유가 없는 분들임에도

조건 없는 사랑을 주셨고 주머니 속 핫팩처럼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위해 따뜻한 곁을 내어주고 계셨던 것이다.


몇 년 후 제주도로 이사를 가시면서 자연스레 만나지 되었는데 그때 그 시절엔 그 사랑과 관심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깊게 생각하며 살지 못했는데 이제야 내가 가정을 꾸리고 그 부부의 상황이 되어보니 절대 쉽지 않았던 행동이었다는 걸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그 시절 그 부부가 내 곁에 없었다면 어땠을까?!

음.. 살아가기는 했겠지만 그때 기억은 쓸쓸함만 남았으리라 생각한다. 따스함 하나 없이 춥디 추웠던 날들이리라-

너무 감사합니다.


말 그대로 나의 중학교 시절은 폭풍 질풍노동 시기 었다.

한 번에 나를 때리지 않던 엄마에게 종아리를 맞야야 했을 정도로 나를 반항은 끝을 달렸갔다.


나를 그렇게 만든 건 가정환경 때문이었는데 아무도 그걸 받아들여주지 않았고 이해 따윈 없었다. 그 속에서 나는 그냥 문제아였다. 이렇게 저렇게 명령으로 집안을 통제하는 새아빠를 모두 무서워하고 겁내했다. 나도 속으로는 두려웠지만 그럴수록 내 자아를 더욱더 강하게 표현해 댔다.


굴러 들어온 돌이라 생각하며 사는 것이 고통인 그곳에서 그나마 버티게 도와준 건 중학교 몇몇의 친구들 덕분이다.

이 사실은 죽었다 깨어나도 바뀌지 않는 진실.


고통스럽다가도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고 함께 시간을 나누고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그 존재들은 나에게 전부였고

우정만 나눈 것이 아닌 나눌 수 있는 전부를 쏟아부었다.

그 순간은 엄마보다도 나보다도 나를 더 알아주던 소중한

존재들.


성인이 되고 상황이 달라졌고 가뭄에 콩 나듯 만나지만

그래도 언제나 우리는 똑같다.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고

툴툴대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상당히 크다는 것.

이젠 우리의 마흔 살이 기대된다. 막연하지만 왠지 그때가

오면 우리는 두 번째 사춘기를 함께 보낼 거라는 희망이 가져볼 수 있기에-


우린 다른 학교로 떨어지지만 그래도 매일 만나자는 약속을 한채 고등학생을 받아들였다. 처음 진학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다행히 그런 나에게 다가온 친구들이 있었다. 여자가 많지 않은 학교였기에 더욱 귀한 존재 들었다.


생각보다 그 친구들과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친해진 속도에 비해 진실된 깊은 마음을 나누기는 힘들었다.

모두 각자 마음속 큰 벽이 있다는 걸 같이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더욱 크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중 한 명과는 진실로 마음을 나눌 수 있었고 당시 간호학원을 다니던 나를 위해 방학이 되면 직접 도시락을 싸서 주기도 했으며 설날,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외톨이가 되는 나와 함께 매번 만나서 영화도 보고 빕스같은 곳에 가서 사치를 부리며 외로움을 함께 달랬다.


역시나 자주는 못 보지만 여전히 함께하는 친구이고 언제 만나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상대로 자리 잡고 있다


성인이 되고 혼란스러운 순간이 있었지만 나름 나는 잘 나아가고 있었다. 원하던 조무사 자격증도 바로 취득해 일을 시작했고 그 직장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런 순간마다 마음 맞는 직원들이 곁에 있었고 그러므로 하루 더 참고 나아가고 또 하루 더 참고 발전하며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며칠 전, 십몇 년 만에 만난 이모가 나를 보며 말했다.

“ 얼굴 보니 확실히 결혼하니 안정감이 느껴지네”


그렇다. 지금 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차원이 다른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주변에선 너무 빨리 결혼한 거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듣지만 그럴 때마다 속으로 드는 생각이 있다.


그때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나에게 미래라는 것이 있었을까?


너무 감사하게도 나는 불행하다고만 생각했지만 그 불행을 덜 수 있도록 때에 맞게 나를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정말 그 덕분에 이젠 잘 살아가고 싶다는 욕심마저 생겼을 정도로 행복 속에 살아가고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겪어야 했던 힘들었던 순간이 없었더라면 지금 누리는 행복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나 큰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을까?


힘들었던 만큼 나에게 그런 온전히 감사함을 누리는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신 거라 생각한다.

받은 만큼 나 또한 베풀며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나만큼 불행 속 살아가거나 살아갔던 사람들에게 나의 확신을 전달하고 싶다. 꼭 불행한 것만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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