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목소리를 듣다.

누군가가 말을 건넸다니까요?

by 사색가 연두

"윤하야, 대회 어땠어?"


아침 종이 울리기 전,

교실 속의 소란은 윤하가 문턱을 넘는 순간 방향을 틀어 그녀에게로 몰려들었다.

누군가는 책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다가왔고,

또 다른 친구들은 창가에서 몸을 기울여 그녀의 표정을 몰래 훔쳐보았다.


"혹시 영상 찍었어? 우리 좀 보여줘!"
"담임 선생님도 기대하시던데? 윤하면 역시나 잘했겠지?"


말들은 가벼운 농담처럼 튀어나왔지만,

윤하의 가슴속에서는 못이 하나씩 박히는 소리가 천천히 메아리쳤다.
흐릿한 무대, 미끄러지듯 어긋난 손가락, 텅 빈 머릿속의 공백.

그날의 모든 상황들이 구름처럼 떠올라 그녀의 눈길을 흐리게 만들었다.


윤하는 결국 웃음인지, 변명인지 모를 얇은 표정을 걸치곤 얼버무렸다.


"아... 그냥... 뭐. 음 그럭저럭..."


하지만 말끝이 모래처럼 흩어지기도 전,

친구들은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헐! 그럼 대상 받을 수 있는 거야?"
"연습할 땐 정말 잘했잖아."

"야, 윤하면 당연히 대상 받아야지. 저번에 음악시간 때 피아노 쳤던 걸 생각해 봐. 선생님도 얼마나 칭찬을 많이 하셨는데."


친구들의 기대에 윤하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손끝으로 가방 끈을 쓸어내리며 시선을 바닥에 붙일 뿐이었다.

왜냐 결과는 이미 당일날 발표가 되었고, 그녀는 아무런 상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싫었던 건 친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나 자신이었다.


그녀는 결국 거짓말로 응수해 버렸다.


"그냥... 사실 이런 동네 대회쯤은 별거 아니잖아? 그러니 딱히 자랑할 이유가 없지. 일단 다음에 얘기하자. 오늘은 너무 피곤해."

"그래그래, 대회 준비 한다고 많이 피곤했나 보다."


윤하는 그렇게 도망치듯 자기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친구들의 시선이 뒤통수에 훤하게 꽂혔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교과서를 꺼내는 동작으로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평소에 허풍을 떨었던 때와는 사뭇 다른 자신의 모습에 얼른 표정을 숨기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윤하는 곧 엎드린 자세로 팔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피곤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저 어떻게든 피곤한 척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후우...


숨이 고르게 쉬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왠지 교실의 공기가 유독 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대답하지 못한 말들이 쌓여 만들어낸,

답답하고도 서늘한 먼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eunduu_a_single_desk_and_chair_in_an_empty_classroom_morning_su_ad394514-ee57-463c-baa6-a3bb1016951f.png




"윤하야, 대회는 잘 마무리했니?"


수업 시간 중 선생님께서 불쑥 물으셨다. 음악 시간이었다.

피아노 연주가 필요할 때면 선생님은 늘 윤하에게 맡기곤 했다.

그럴 때면 윤하는 당당하게 걸어 나가 아이들의 노래를 받쳐줄 반주를 연주했다.


아마도 선생님께선 아직 윤하의 콩쿠르 대회 결과를 모르는 듯했다.

윤하는 대충 "네."라고 대답했다.

속으로 얼른 이 상황이 빨리 마무리되길 바랐다.

제발 더 캐묻지 말기를...


"우리 윤하, 이러다가 정말 멋진 피아니스트가 되는 거 아니야?"

"어..."


윤하는 시선을 어디로 둘지 몰라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다.

사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너무 쉽게 생각해 왔던 것이 아닐까.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지금 이곳은 너무나도 좁은 세상일 뿐이었다.


항상 자신감 넘치고 활발하며 모범적인 아이.

주위 친구들과 어른들에게 받아왔던 자신의 이미지였다.

덕분에 반장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으며,

학급 내에서 열리는 대회나 공모전엔 언제나 이름이 올라가 있곤 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고작 범위를 학교에서 동네로만 넓혔을 뿐인데

자신에 대한 아무런 존재감도 드러내지 못하지 않았는가.

윤하는 그런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의 기대엔 언제나 부흥해야 마땅했다.

그것이 옳은 일이자, 착한 일이다.


"윤하는 꼭 될 거예요!"

"그럼! 우리 반 반장인데!"


아이들이 하나둘씩 윤하를 띄우는 분위기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윤하의 모습을 보곤 선생님은 얼른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자, 주목! 오늘 배울 노래는 작은 종이배라는 노래예요. 이번에도 윤하가 반주 좀 맡아 쳐 줄래?"

"네."


윤하는 여느 때처럼 당당히 걸어 나와 피아노 앞에 가 앉았다.

동요쯤이야 그녀에겐 식은 죽 먹기였으니 별 문제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얹자마자 불현듯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공허한 들판 위에 떨어진 양 한 마리.

그 주위를 맴돌고 있는 시선들은 먹잇감을 노리는 늑대의 시선.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그들의 모습.

그리고 노골적으로 먹잇감만을 비춰주는 조명.


손끝이 심하게 떨려오고 심장은 미칠 듯이 뛰어댔다.

호흡이 좀처럼 진정되질 않자, 윤하는 잠시 건반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거둬 들었다.


"우욱!"


닥쳐오는 압박감에 버티지 못한 윤하는 순간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선생님이 서둘러 윤하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윤하는 선생님의 손길을 뿌리치고 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윤하야!"


선생님은 곧장 윤하를 따라 교실 밖으로 나갔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던 상황이었다.

아이들이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소란은 그날 내내 가시지 않았고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윤하는 밥도 거른 채 보건실에 가 누워있었다.

점심시간 동안 몇몇 친구들이 윤하를 보러 방문했지만,

윤하는 그들을 외면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윤하, 무슨 일 있니?"


평소 같지 않던 그녀의 모습에 보건 선생님이 물으셨다.

하지만 윤하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결국 보건 선생님도 그만 입을 거두고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 저 나이 때 애들이 한 번씩 그렇지라며 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선생님."

"응?"


갑자기 윤하가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공포심에 떨고 있는 목소리 같았다.


"저... 괜찮은 거 맞죠? 죽는 거 아니죠?"

"괜찮아. 안 죽어." 보건 선생님이 헛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피아노가 무서워요. 몸이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단 말이에요. 큰 병원에 한 번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피아노가 왜? 너 피아노 잘 치잖니."

"그게..."


윤하는 차마 그녀에게 대회에서 있었던 일을 말할 수 없었다.

사실은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런 일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늘 쉽지 않은 법이었다.

단 한 개의 상도 받지 못한 사실이 부끄러웠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다른 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것만이 윤하의 머릿속을 온통 헤집고 다녔다.


"아 맞다. 윤하 이번에 대회 나간다 하지 않았어?" 보건 선생님이 물으셨다.

"네..."

"그러.."

"저 이제 다 나은 것 같아요! 가 볼게요! 감사했습니다."


윤하는 말을 탁 끊어버리고선 헐레벌떡 침상에서 일어나 보건실 밖으로 뛰쳐 나가버렸다.

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가 보건실 속 남은 공기를 흔들었다.

보건 선생님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 그런 윤하의 급한 발걸음을 눈으로만 좇을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윤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내 그녀는 윤하가 대회에서 문제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보건실에서 도망치듯 나온 윤하는 길 잃은 강아지처럼 복도에서 서성거렸다.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었다. 아직 수업이 끝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교실에 들어가긴 싫었다.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까 궁리하던 중 하는 수 없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갈만한 곳이 그곳밖엔 없었다.

아마 지금 즈음이면 도서관엔 사서 선생님 말곤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윤하는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겨 도서관이 위치한 4층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윤하가 계단을 올라 4층에 도착한 순간,

창문에 바람이 새어나옴과 동시에 아주 미세하고 투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빛은 사라지지 않아."


윤하는 깜짝 놀라 곧장 걸음을 멈추고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복도엔 햇빛과 먼지, 그리고 자신의 숨결밖에 없었다.


eunduu_a_quiet_school_hallway_with_sunlight_streaming_through_l_3ce9f101-58ee-4038-b9a8-3ad861cceaa4.png











keyword
이전 02화별을 쫓던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