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가재도구를 조사할 때, 나는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선생님, 우리 집에 2층 침대도 있어요. 2층 침대 있는 건 우리 집 밖에 없을 거예요’ 라고.
내가 7살 무렵 우리 집에 커다란 2층 침대가 들어왔다. 천장에 닿을 듯한, 높고 거대한 침대가 쌍문동 작은 골목, 작은 단층집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진한 갈색의 나무 침대가 우리 집 작은 방을 꽉 채운 날,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얼마나 신이 났던지 침대 위를 방방 뛰고, 나무 계단을 밟고 2층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내 일곱 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신기한 듯, 창문으로 우리 집을 기웃거렸다. 동네 아이들은 2층 침대 구경하러 우리 집에 들어오기도 했다.
1970년대 당시 서민 가정에서 침대는 귀한 가구였다. 그 때 침대는 부자 집에서나 드물게 있었다. 우리 동네 어디서도 침대 있는 집이 없었다. 그 때는 침대가 귀하고 비싸서 못 산 것도 있지만, 다들 집이 좁다보니 침대 하나 놓을 공간이 없었다. 그런데 15평정도 될까한, 우리 집에 그 귀한 침대, 그것도 2층 침대가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2층 침대는 작은 동네에 큰 구경거리였다. 이 침대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이사 가면서 버려졌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엄마에게 물었다. 그 어려웠던 시절에 어떻게 2층 침대를 샀냐고.
“애들은 많지, 잘 데는 좁고, 그 때 수유시장에 가서 비싸게 샀지. 위층과 아래에서 두 명씩 자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엄마는 상일가구였다고, 가구회사까지 기억했다. 엄마는 집 앞 골목으로 2층 침대를 실은 용달차가 들어오는데, 그렇게 기뻤다고 회상했다. 나도 그랬다. 작은 집으로 들어왔던 커다란 침대. 아동기부터 고교생이 될 때까지 나는 여기서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을까.
사춘기, 2층 침대에 올라 라디오를 머리맡에 놓고 조용히 음악을 듣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2층에 누워 팔을 뻗으면 손이 천장에 닿았다. 그래서 이 공간은 아늑한 다락방처럼 느껴졌다. 매일 밤 잠들기 전, 2층에서 라디오 듣고 책 읽고 일기를 쓰면서 소녀의 감성을 키웠다. 이처럼 내 유년기와 사춘기를 함께 한 2층 침대에는 나만의 애틋한 감성과 추억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나에게 이 침대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잊지 못할 친구 같은 존재다. 특히 한 인간의 성장기에 함께 한 물건, 애정이 깃든 사물은 그 사람의 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사물이 주는 기쁨과 행복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느꼈다.
“엄마,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2층 침대를 사줘서 감사합니다. 일곱 살 때부터 이 침대 덕분에 내 방이 없었어도, 천장이 가까운 이 공간에서 나만의 꿈과 소망을 키웠습니다.”
서울 도봉구 쌍문 1동 301번지.
일곱 살 때, 2층 침대가 들어오면서부터 이 집의 기억이 뚜렷해졌다. 야트막한 산자락 아래 작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고만고만한 집들이 모여 살던 쌍문동 동네. 나는 매일 산으로 들판으로 아이들과 뛰놀며 자랐다. 그러다 1979년, 쌍문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 날 교문 앞, 꽃이 만발한 화려한 배경에서 찍은 내 첫 입학사진을 보며, 엄마는 “너 쌍문초등학교 입학식 때 얼마나 예쁘게 사진 찍어줬냐”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입학식을 마치고 1학년 5반 교실에 처음 들어선 순간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키 순서대로 번호를 정했던 그 때, 나는 맨 앞줄에 앉았다. 짝궁 이름은 김영민. 생애 첫 짝궁이라 이름도 기억한다. 엄마 나이대의 온화한 성품을 지닌 홍순자 선생님은 나의 첫 담임선생님이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무척 얌전했다고 한다. 학급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말없이 조용한 아이였다. 그 차분한 기질로 공부에 매진했거나, 독서에 빠졌으면 좋으련만, 나는 공부보다 동네에서 사방팔방 뛰어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