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독한 '단발병'을 앓고 있다. 단발병이란 다행히 실제 병명은 아니고 머리를 기르지 못하고 단발로 자르는 것을 병에 비유한 신조어이다. 주로 단발 스타일을 한 연예인 사진을 보고 충동적으로 발병하는 경우가 많다. 어릴적(?)엔 머리를 길게 길렀다가 긴 머리 스타일이 지겨워지면 댕강 잘라 기분전환을 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머리가 기르기 무섭게 잘라버리고 싶은 욕구가 차올라 단발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누가 단발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걸까?
그 시작은 작년 임신했던 시기부터였다. 임신을 하면 모든 것이 조심스러워진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약 복용, 옷 입는 것, 행동 하나하나까지.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건 미용실 이용까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머리카락에 바르는 약품이 흡수되어 태아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곱슬머리였던 나는 정기적으로 매직 시술을 해서 찰랑거리는 머리를 유지하곤 했는데 마침 매직 시술을 할 시기에 임신 확인을 하여 미용실 갈 시기를 놓쳐버렸다. 비록 천연 약품을 사용하는 미용실도 있고, 안정기에 접어들면 괜찮다는 의견도 많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다 싶어 조금 불편해도 참고 지냈다. 그 대신 관리가 안 되는 머리를 단발로 짧게 잘라 버렸다. 그 이후로 지독한 단발병이 시작되었다.
임신 기간 중 못했던 것들, 출산 이후 꼭 하리라 다짐했던 것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매직 시술이었다. 관리가 안 되는 곱슬머리에 어중간하게 길어버린 단발머리. 산뜻하게 해결하고 싶었는데 초보 엄마는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출산만 하면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모유수유를 하면서 먹는 것도 조심하는 와중에 머리에 약품을 바를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신생아와 함께라면 2~3시간마다 수유하는 일상이 반복되기 때문에 적어도 3시간은 걸리는 매직 시술을 받으러 외출하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 시기엔 항상 잠이 부족하기 때문에 짬이 나는 대로 잠을 보충해야 했다.
어느덧 아기 백일이 지나고 백일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주말에 남편에게 아기를 맡기고 2년 가까이 방치했던 머리를 쫙 피고 짧은 단발로 싹둑 잘라버렸다. 미용실을 나서는데 머리가 가벼워 날아갈 것만 같았다. 비록 상쾌한 발걸음으로 향하는 곳은 다시 육아 현장에 투입되는 것이었지만 기분전환은 확실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한결같은 머리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미용실에 가면 항상 묶을 수 있는 길이의 단발로 잘라주세요!라고 요청한다. 육아하면서 발견한 나만의 최적의 머리스타일이다. 머리 감고 말리기 편하고 때로는 질끈 묶고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씩 긴 머리의 엄마들을 보면 평소 어떻게 관리하는지 존경스러운 마음이 든다. 그러고는 나도 한번 길러볼까 싶지만 머리가 어깨에 닿는 순간 또다시 단발병이 도져버린다. 당분간은 단발을 유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