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로또도 꽝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내가 뭐 그렇지. 무운과 성실의 아이콘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적어도 난 그런 경우다. 지난 주에는 정신의학과에 갔더니 원래 진료 보던 선생님께서 앉아 계시더라. 단골 미용실 원장님을 뵌 것처럼 괜시리 마음이 반갑더라고. 하지만 웃지는 못했다. 웃고 우는 법을 잊은 청춘이라 이 병원에 온 거지, 다시금 통감했다. 선생님께서는 약의 용량을 지난번보다 조금 더 높여주시고, 약의 종류를 원래 먹던 것으로 바꿔주시고는 물었다. 늘 같은 질문이다.
"이번에 오면서 꼭 물어야겠다는 질문, 있어요? 뭘까요?"
내 대답도 한결같다.
[모르겠어요.]
쭈뼛거리는 말투와 자신감 없는 손가락은 덤이다. 모르니까 왔지 이 양반아, 내가 뭘 잘못되어서 우울한지 알고 있으면 여길 오겠냐고요. 가득찬 마음의 불만은 금새 힘이 없이 사라진다. 약을 타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문득 든 생각.
[왜 세상은 청춘에게 꼭 답이 있다는 듯이 무자비한 질문 폭탄을 던져댈까?]
생각해보니 억울하네. 더위를 피해 그늘막으로 자박자박 걸었다. 내가 지금 낼 수 있는 답이라고는 이 땡볕 더위를 피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왼쪽 보도블럭 대신 오른쪽 보도블럭이 더 시원하다는 것, 빨리 집에 가서 씻어야 한다는 것 정도이다. 하지만 세상이 내게 심심치 않게 물어오는 질문들은 나를 이상하리만치 집요하게 쫓아오는 것만 같다. 무겁기도 하지. 무섭기도 하고. 이를테면 이런 질문들.
- 결혼은 할 거니?
- 더 좋은 데 살려면 저축 열심히 해야지, 얼마나 하고 있어?
- 요샌 한 직장 다니면서 평생 못 산댄다. 퇴근하고 키울 부캐 없어?
- 이것저것 하기 얼마나 좋은 세상이야. 알차게 주말 잘 보내고 있는거니?
- 얼굴이 그게 뭐니, 좀 꾸미고 살아야 남들이 무시 안 한다?
자, 내 대답을 찬찬히 해보자면 모르겠고, 비밀이고, 부캐 키워도 물어보는 님한테는 말하기 싫고, 알찬 주말 너나 잘 보냈으면 좋겠고, 그런 말 할 거면 옷 사게 돈 오만원이라도 줬으면 좋겠고.
언젠가 좋은 미래가 있을 거란 희망으로 버텨낸 서울살이. 서른이 되고 돌아보니 내가 제일 후회되는 건, 저 질문들에 하나같이 모두 답을 다 해주려고 친절했다는 것이다. 무자비한 질문에 나는 [모르겠어요.], 혹은 [여기에만 대답할래요.], [이것만 하고 이건 안 할래요.]라고 해도 됐었다. 그럼 저 질문 괴물은 오, 그렇군 하고 쏙 들어가버리는데. 저 몬스터를 퇴치할 방법이 하나 하나 칼을 맞아가며 방패만 들이미는 것이 아니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다. 질문들에 사지가 붙잡혀 이것 저것 모두 조금씩 다 충족시키려다 찢어졌다. 진짜 팔다리 말고 마음이.
나는 나였어야 했는데, 나의 목소리를 내가 잘 들었어야 했는데, 내 색을 얼른 되찾았어야 했는데.
이렇게 후회할 줄 알았나, 뭐. 옛날부터 국영수사과를 모두 고루 잘 해야 대학을 잘 가던 성실한 모범생 습관이 인생에 악영향을 끼칠 줄은 몰랐다. 그러니 나는 이제 내 과녁을 스스로 바꿔 달려고 한다. 그러려면 원래 있던 삶의 다양한 과녁 여러개를 추려서 중요한 것만 남기고 떼 내버려야 했다. 아, 그래서 의사 선생님이 오늘 선심 쓰듯 전기 치료를 해주셨구나- 싶다.
"원래 종합 병원에 가면 3만원 넘게 하는 건데, 이게 동네 정신과라고 환자분들이 다 돈 얘기를 하자마자 안 한다고 하시더라고. 즉각적인 효과에는 이게 최곤데 말예요. 그, 그래서 그런데 혹시 진료 끝나고 시간 있으세요? 어디 뭐 급하게 가셔야 한다거나 그런 거... 아니구나. 그럼 잠시 30분만 전기 치료 좀 하고 가세요."
전기 치료를 하면 어쩌구, 비급여 어쩌구, 등등이 적혀있는 치료 동의서에 싸인을 했다. 그랬더니 머리에 헤어밴드하듯 관자놀이께에 기계가 달린 찍찍이를 달아주셨다. 그리고는 회색 소파에 앉으라고 하셨다. 뇌파로 즉각적인 우울감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는 거니까, 잠들지만 않으면 된다고 하더라. 치료가 시작되었고, 나는 불쾌한 전기 자극이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가며 머리를 놀리듯 때리는 걸 가만히 느꼈다.
지직- 왼 쪽 머리를 몇 번 때리고, 지지직- 오른쪽 관자놀이를 지긋이 때리고
지직- 상담 선생님의 말이 스치고, 지지직- '나예요. 인생의 중심은 나. 상황 말고요.'
지직- 당장 할 수 없는 경제적인 풍요에 할 수 있는 만큼만, 지지직- 부동산공부도 주식공부도 일단 저축을 더!
지직- 배배 꼬여버린 자격지심에 놓친 내 장점을, 지지직- 소설 쓰기를 다시 시작하고
지직- 돈을 아끼기 위해 만 원짜리 티셔츠를 사고, 지지직- 만 원짜리 입어도 예쁜 날 기특해하고
지직- 결혼을 할까말까 망설이지 말고, 지지직- 평생 함께할 확신이 들만큼 경험을 쌓아보고
30분이 지났고, 머리에 씌워졌던 기계가 사라졌다.
지금 할 수 있는 오늘을 살아낸다. 무언가 할 수 없는 오늘이 어제 때문이 아님을 알면 된다. 삼일 뒤는 몰라도 오늘 저녁이나 내일 오전 정도 기대할 수 있으면, 괜찮다. 그렇게 살아볼 시간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러나 저러나 다 예쁜 특별한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