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탈곡기로 타작하는 날
누렇게 익은 벼가 황금물결을 일렁이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되었다. 모내기, 논매기 등 힘들었던 일들을 다 잊게 하였다. 된서리가 내리기 벼가 마르며 벼 베기가 시작된다. 할아버지는 낫을 여러 개 준비를 했는데 나는 숫돌에 낫을 가는 일을 거들었다. 할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다가 지금은 할아버지가 인정한 칼갈이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잘 갈린 낫으로 볏짚을 잘라 보고는 더 갈아야 할지를 결정했다. 낫은 벼 베는 낫은 얇아서 잘 갈렸는데 나무를 할 때 쓰는 낫은 무겁고 칼 갈이도 배로 힘들었다. 나무 베는 낫은 조선낫이라고 할아버지는 불렀다. 조선낫을 가져오너라 하고 말하면 나는 두껍고 무거운 낫을 가져갔다. 그냥 낫이라 하면 벼 베는 낫을 말했다.
벼를 베면서 큰 단으로 묶었다. 벼를 어느 정도 베면 어른들은 양쪽 옆구리에 볏단 한 단씩을 끼고 벼 이삭 부분을 붙이고 힘을 주며 바닥을 치며 볏단을 세웠다. 볏단을 세우는 것을 ‘발가리 친다’ 하였다. 발가리를 잘 치면 바람이 세게 불어도 넘어지지 않았고 비가 와도 볏단 속으로 물이 들어가지 않았다. 발가리의 볏단을 세어 100단에 벼 한섬이 나온다고 했다. 대충 생산량을 알 수 있었다.
논두렁에서 벼가 어느 정도 마르면 마른 볏단을 수레에 싣고 집으로 운반했다.
논에서 볏단을 집으로 나르는 일은 할아버지와 함께했다. 소 구루마에 볏단을 할아버지 키보다 더 높게 쌓아 올렸다. 볏단을 가득 실은 구루마를 끄는 소도 힘든지 입에 거품을 물었다.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논과 집을 오고 갔다. 볏단을 가득 실은 구루마를 끄는 할아버지께서는 구루마에 타지 않고 소와 함께 걸었다. 나는 처음에는 볏단 위에 올라앉아서 집으로 왔다. 나중에는 나도 할아버지와 함께 걸었다. 소를 모는 것은 나도 할 수 있었는데 짐이 너무 많이 실려 있어서 오늘처럼 큰 일을 할 때는 고삐를 맡기지 않으셨다.
마당에 큰 볏가리가 만들어졌다. 볏가리를 만들 때는 벼이삭이 안쪽으로 들어가게 원뿔형으로 쌓은 후 꼭대기에는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이엉을 덮었다.
집안에 볏단이 모두 쌓이고 타작하는 날이 잡히면 할머니께서는 새참 준비거리를 준비하느라 바빠진다. 막걸리와 겉절이 김치도 있어야 했다. 점심은 무가 잔뜩 들어간 고등어조림이라도 내놓아야 했다. 품앗이로 벼타작을 했기 때문에 어른들이 몇 사람 모여서 일을 했다. 작년 까지는 벼타작을 발로 밟는 기계로 두 사람이 발로 밟으며 벼를 털어냈다. 올해는 마을에 발동기를 가진 사람이 있어서 온 마을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면 발동기를 이용하여 벼를 털었다. 발동기는 우렁찬 소리를 내면 푹푹 연기를 뿜으면 잘도 돌아갔다. 이제는 발로 밟는 대신에 짚단을 대기만 하면 벼가 털려 나갔다. 나는 벼가 털린 짚단을 쌓여 장소로 운반하는 일을 했다. 사람들은 모두 온몸에 하얀 먼지가 내려앉았다. 발동기 소리 때문에 사람들은 고함을 지르며 말을 주고받았다.
벼가 모두 털리고 가마니에 벼를 담아 뜰에 가지런히 올려놓으면 일은 대충 끝이 났다. 내일부터는 벼를 멍석에 말리는 작업이 시작되긴 하겠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큰 일을 끝냈다 것에 웃을 수 있었다.
일이 마무리될 무렵 나는 할아버지와 짚단을 쌓았다. 짚단이 점점 쌓이면서 높아져서 할아버지가 높은 짚단 더미로 올라가고 나는 밑에서 던져 올렸다. 작년에는 짚단을 높이 던지지 못해서 서부할아버지께서 던지는 작업을 해 주었다. 지금은 휙휙 던져서 할아버지가 받을 수 있도록 정확하게 던질 수 있는 힘도 생겼다. 할아버지는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면서 손을 내밀면 낚아챌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추었다. 우리는 서로 호흡이 잘 맞았다. 할아버지는 흡족해했다. 짚단 쌓기가 끝나자 할아버지는 새끼로 묶어야 하니 새끼를 가지고 위로 올라오라고 했다. 나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할아버지는 새끼를 양 사방으로 걸치게 하고 내려가서 큰 나무를 묶어 매달아 짚단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고정시켰다. 일이 끝나자 할아버지께서 나를 번쩍 안아 내려 주었다.
저녁은 멍석을 깔고 마당에서 먹었다. 서쪽 하늘은 붉게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오늘 일이 잘 마무리된 것에 흡족해하셨다. 그리고 짚단을 던지는 힘이 좋아졌다고 나를 부추겨 주셨다. 할머니께서도 짚단 던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이제 우리 집에도 장군이 생겼다고 하시면서 좋아하셨다.
저녁을 먹고 잠시 멍석에 앉아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쪽 하늘에 유난히 반짝이는 별이 떠 있었다. 늘 가장 먼저 빛나는 별이었다. 나는 벌러덩 누워서 별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할머니께서 샛별이라고 했다. 샛별 같은 사람이 되라고 그렇게 부른다면서 나도 샛별이라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하늘을 보다가 전쟁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날도 이렇게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고 했다. 전쟁이 나고 북한군이 갑자기 마을에 나타나서는 마을 대표를 부르더니 젊은 남자들을 모두 모이도록 했다. 할아버지께서도 불러나가 마을 회관 공터에 모였는데 저녁에 각자 지게를 지고 이곳으로 다시 모이라고 했다.
그날 밤부터 부역꾼으로 끌려갔던 할아버지는 밤이 되면 지게에 탄약을 가득 메고 힘든 길을 밤새 걸어서 갔다가 새벽에야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북한군은 깜쪽같이 사라져서 부역꾼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했다. 그때 산길을 걸으며 밤하늘이 별을 실컷 보았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북한군이 물러간 뒤에 우리 국군의 선발대라고 부르는 부대가 나타났다. 북한군에 동조하여 일을 한 부역자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우리 마을은 제외되었다고 한다. 천만다행한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멀리 산 넘어 동네에는 무슨 연맹인지도 모르고 연맹을 가입하고 또 그들이 준 완장을 차고 다녔다가 모두 뒷산에 끌려가 총살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할아버지도 큰 일을 당했을 텐데 운이 좋았다고 했다. 착하고 농사일 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전쟁은 일어나면 절대로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사랑방으로 들어가시고 나는 할머니와 샛별을 다시 찾았다. 밤하늘은 별들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