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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어탕에 우울을 말아 후루룩 마셔버리자.

당신 덕에 오늘 하루도 버티네

by Wishbluee

2025년 11월 5일 오후 11시


"왜, 왜 연차를 냈어. 나 오늘 그냥 나가기도 싫은데."


거실에 앉아서 투덜거린다.

"배도 안 고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진동을 한다.

남편이 지긋이 내 얼굴을 바라본다.

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다.


"아, 그럼 뭐, 뭐 먹고 싶은 거 먹던가. 뭐 먹고 싶은데?"


배는 고픈데 먹고 싶은 건 별로 없었다. 뭘 먹던 상관없을 것 같은 느낌.


그래. 그냥 그거 먹자고 할까.


"매운탕 집에 추어탕도 새로 팔던데, 이벤트로 한 그릇에 만원이더라. 그거나 먹자."


후, 후,


따듯해질 만하면 다시 찬바람이 솔솔 부는 날씨. 손이 시려워, 후, 후 입김을 불어넣는다.


매운탕 집에서 하는 추어탕이라, 별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보글보글 끓는 탕을 받아 들자, 먹고 싶은 것 별로 없다던 내가 남편 보다 더 빠른 속도로 숟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들깨 가루를 듬뿍 뿌리고, 마늘과 청양고추를 양껏 넣어서 휘휘 젓고, 국물 맛을 본다. 밥을 반 그릇 뚝 떠내어 추어탕에 말아 푹푹 수저로 밥알을 섞는다. 한 수저 크게 떠서 갓김치 한 점, 배추김치 한 점 차례로 올려 입 안 가득 넣고 우물우물. 어느새 추어탕 한 그릇이 절반이나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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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네."


얼음장 같았던 손에 온기가 돈다. 배가 따뜻하게 차오르자, 무거웠던 생각들이 조금 가벼워진다. 든든한 배를 두들기며 남편과 함께 가게를 나섰다.


오늘 하루 집에서 혼자 잡일을 하며, 밀린 독서나 할까 했었다. 하지만 분명 한 장도 읽지 못한 채,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책을 덮었을 것이다.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니. 문장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며칠 째 축 처진 어깨로 멍하니 앉아 있던 나를 남편은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아까운 연차를 나를 위해서 써버렸다. 쉬고 싶을 때 쓰지. 왜 나를 위해 써. 위한다고 해도 마뜩잖은 얹잖은 기분. 왜 그럴까. 괜스레 투정이나 부리던 마누라. 뭐가 이쁘다고. 쉬지도 못하고 운전해서 나를 데리고 밥을 먹으러 오나.


남편은 말했다.

"네가 힘든 건, 다정해서야."


마음 주머니에 온갖 일들이 꽉꽉 차서 넘쳐흐르는데, 나는 그것들을 흐르도록 두지 못한다고 했다.

그냥 하는 말들을 모조리 지나치지 못하고, 주워 담아서 주머니가 터지도록 집어넣기만 하니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라, 괴로운 거라며.


나는 그냥 감당이 안 되는 거라 생각했지. 내 그릇이 작다고 여겼지. 그래서 투덜거리고 울적해하는 거라고.


그런데 그걸, 그렇게 봐주다니.


고맙네.


하루하루가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 봄인가 싶었는데 벌써 가을이다. 남편과 나도 세월에 휩쓸려 흘러간다. 처음에는 좋아서 만났는데 살다 보니 분한 일이 자꾸 생겼다. 남편 말처럼, 나는 그런 일들을 주머니에 모두 쑤셔 넣는다. 그런데 내 주머니는 너무 좁아서 금방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그 분한 일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화가 났다. 무심한 남편도 미웠다. 뒷짐 지고 모른 척, 지나치는 그 덤덤함이 속상했다. 정리안 된 감정들이 쌓여고 쌓여서 마침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남편은 이제는 그걸 모른 척하지 않는다.


우리 둘 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하다. 그 하얀 가닥 수만큼 흘러버린 세월 동안, 내가 보냈던 신호를 그 사람은 이제 받아 준다.


그러니 고맙지.


돌이켜 보면 나한텐 그냥 남편뿐.

남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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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해준 다정한 말을 기억해야지.

그래. 나는 다정한 사람이라서 힘든 거라고 생각해야지.


우울 따위는 추어탕에 말아서 후루룩 마셔버리자.

남편 말대로 그저, 가을을 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뭐든지 옅게 만드는 시간의 힘을 기다리면서,

오늘은 이렇게 그에게 기대어 보내본다.


버석이는 낙엽 사이로 비치는 한줄기 빛.

바라보기도 힘든 눈부심에 한쪽 눈을 찌그러트려가며 올려다본 새파란 하늘.

빨갛고 노란 낙엽들을 바라보며

가만히 읊조린다.


"예쁘다. 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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