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퇴사 후 명상선생님이 되었다고요?
'나는 직장생활에 맞지 않는 사람인가?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할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내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회사원이 되고 싶었다.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아침마다 새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하는 아빠가 멋져 보였다. 막연히 크고 좋은 회사에서 일하는 회사원이 되길 바랐다. 그래야 인생을 잘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꿈꾸던 회사에 입사했고 행복해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대체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하는 것인지 끝도 없는 의문이 몰려들었다. 나는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겨우 워밍업 좀 해보고 스타트라인에서 포기해야 하는 것만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다른 직원들은 나와 다르게 멀쩡하게 할 일을 하고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여기서 꿈꾸던 직장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원래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인 것인지. 그러다 고민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 결단을 내려야만 할 것 같은 조바심을 느꼈다.
상무님이 나를 찾으셨다. 신입 때부터 보셨으니 지금 나에게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감지하신 것이었다. "병원에서 진단서를 써올 수 있겠니? 뭐라도 써올 수 있으면 인사팀이랑 상의를 해보자. 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평소에도 인자하셨던 상무님은 감사하게도 조직의 작디작은 직원 한 명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은인이었다. 그만두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과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포기해야 하는 현실에 절망하던 그때 상무님의 한마디로 꽉 막혔던 숨구멍에 한점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실낱 같은 희망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그때 나는 저명한 대학병원에 다니고 있었다. 진단서를 받을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교수님께 말씀을 드렸는데 교수님 역시 쉬어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면서 검사 하나를 진행하셨다. 그것은 요즘에는 매우 흔하게 '스트레스 검사'로 불리는 '자율 신경계 반응검사'였다.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긴장할 때 올라가는 교감신경은 과도하게 항진되고, 이완을 담당하는 부교감신경은 거의 활성화 되지 못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나는 24시간 이완되지 못하고 긴장하고 있는 상태로 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낙오자와 생존자 사이의 갈림길에서 나는 짧은 휴식을 맞았다. 방치하지 않고 따듯하게 내 손을 잡아주신 상무님, 선배들 그리고 회사의 배려는 나에게 포기하지 않을 힘을 주었다.
휴식기를 가지게 된 것은 매우 희망적인 일이었음에는 틀림없었지만, 그렇다고 증상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증상의 원인을 알게 됐거나 좋은 치료법을 발견했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잠깐의 유예기간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좋은 회사 들어와서 열심히 일하면 행복할 줄 알았지. 이렇게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으로 절망감에 빠질 것이라는 것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나의 계획에 단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장면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내 인생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가. 끝도 없이 계속되는 의문 속에 나는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회사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들면 그렇게 아프겠어, 그만두고 결혼해서 미국에 들어오는 건 어떨지 생각해 봐"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당시의 남자친구는 계속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말했다. 정말 달콤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회사를 떠나면 회사에서 시작된 고난을 끝낼 수도 있지 않겠나. 이 꼴 저 꼴 안 보고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겠지. 어쩌면 그것은 그때 내가 가장 힘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선택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말은 더욱 무겁게 내 마음을 짓눌렀다. 화답하지 못하고 더 큰 고민에 빠지게 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회피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도망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나는 내 손으로 직접 내 안의 나를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 이렇게 무력하게 쓰러진 채로 내 인생의 주요한 한 단락을 마무리 짓고 싶지 않았다. 이 시련을 피해버리면 나는 직장생활이 아닌 인생의 낙오자가 될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그 제안에 대답을 하지 못 함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