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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 낙원을 잃어버렸어요

by 반항녀

요즘 계속 머릿속이 시끄럽다. 선택해야 하는 것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워낙 선택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던 나는 회피를 하려 하고 있다. 선택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결과에 따른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 맞겠다.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 보니 정신적 피로도가 상당하다. 어느 순간 정신적 피로도가 육체로 넘어왔는지 몸이 무겁고(살이 쪄서 그렇겠지) 무기력하고 한 것도 없는데 피곤만 하다. 리프레쉬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내가 정말 사랑해마지 않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짠 냄새마저 너무 그리운 바다를 보러 갔다.

이제 날씨도 좀 따뜻해졌으니 그냥 모래사장 위에 철퍼덕할 셈으로 책만 덜렁 들고 말이다.


그 사랑하는 바다까지 가는 것도 사실 귀찮아서 가는 길에 몇 번 망설여졌는데 차가운 모래와 바다를 보고 앉았을 때의 그 청량함이 내게 힘을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꾸역꾸역 갔다.


바다, 광안리.

취업준비로 암울하던 시절, 바다는 나의 낙원이었다. 한 겨울에는 패딩에 목도리, 장갑까지 완전 무장을 해서 바닷가를 걸었고, 여름에는 얼굴만 그늘에 넣어놓고 바다 바람으로 열기를 식혀가며 햇살을 쬐다가 화상도 입고. 봄, 가을은 말해서 무엇하리. 마냥 좋은 걸.

그런데 꾸역꾸역 찾아간 낙원은 힘을 못 썼다. 낙원이 아닌 그저 바다였다. 드라마틱하게 속이 뻥 뚫릴 줄 알았는데, 바다 냄새와 파도에 압도.. 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의 전율이 느껴질 줄 알았는데.


실망보다는 나에게 영원토록 절대적인 낙원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약간의 공포감이 들었다.

실낙원 상태가 된 것이다!! (실낙원이라는 책을 안 읽어봐서 단어 그대로 받아들였다. 잃어버린 낙원..)


바다가 낙원에서 탈락했다고 해서 아름답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저 기대한 만큼 나에게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을 뿐.. 좋기는 좋았다.


나는 이제 어디에 의지를 해야 하나.


아, 그런데 예전에도 몇 번의 무조건적으로 내 기분이 좋아질 낙원을 만든 적이 있었다. 과거형이니 그 일들은 낙원으로서 역할을 더 이상하지 못한다는 뜻인데 그 대상은 마라샹궈와 카페라테였다.


동생이 마라샹궈를 꼭 먹어야 한다고 해서 먹게 됐는데 두피에서 땀이 나는 것이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때 동생한테도 말을 했었을 거다. 마라샹궈는 내 기분을 좋게 해주는 마법약이라고. 하지만 최근에 먹었을 때는 맛있고 살찔 것 같기만 했다.


그리고 카페라테. 아메리카노를 먹으면 불안증이 올라와 못 마시다가 마시게 된 카페라테는 나를 정말 신나게 해 줬다. 그래서 그때도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카페라테’라는 규칙을 만들었는데 이제는 매일 자연스레 먹어줘야 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지나간 낙원들을 생각해 보니 바다가 나에게 낙원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또 다른 낙원이 나타나겠거니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이것저것 다양하게 많이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사람만은 절대 낙원으로 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철칙. 그대로 있는 바다에서 조차 상실감을 느끼는데 사람한테서는 얼마나 잦게, 빠르게 느낄까. 그리고 그 대상은 무슨 죈가!


아무튼 오늘은 또 다른 낙원을 찾아 나섰다.

1인 서재를 갔다가 밀면이나 냉면을 먹어야지.

과연 나에게 낙원이 되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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