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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항녀 May 25. 2024

아빠의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우리 아빠는 여리다.


내가 생각했을 때 여리다.


착하고.. 마음도 여리고.. 뭔가 지켜주고 싶은 느낌?


하지만 60년 넘게 무탈히 살아오셨는데 고작 반만큼 산 내가 무얼 걱정하고 지켜주리.


이런 아빠가 하는 말 중에 내가 유난스레 뭐라 했던 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아휴.. 할머니 얼마 못 살겠다..’


‘하.. 할아버지도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


아빠의 부모님에 대해 얼마 못 살겠다고 말하는 소리!!


약 20년 전부터 아빠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뵙고 오면 이 말을 하곤 했다.


최근에는 할머니 요양원에 가서 할머니가 맛있게 다과를 드시는데 그 앞에도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아빠를 처음 봤을 땐, 나도 어렸으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래서 아빠를 어떻게든 위로해줘야겠다 생각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한 기도를 했다.


마리안나(내 세례명)는 침대에 누워 아무도 모르게 성호경을 긋고 ‘할머니, 할아버지 오래오래 살게 해 주세요. 우리 아빠 마음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를 하곤 했다.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어느새 20년이 흘렀다.


지금 할아버지는 95세, 할머니는 92세시다.


할아버지는 남해 시골마을에서 근처 아주 가까운 시장을 가실 때, 수동 마티즈를 운전하고 가신다.


그리고 직접 국도 끓여드시고 청소도 잘하시고 감도 키우셔서 때가 되면 보내주신다.


할머니는 비록 요양원에 계시지만 찾아뵐 때마다 챙겨간 바나나, 카스텔라 등등 과자도 잘 드시고 사진을 찍을 때면 귀엽게 브이도 하시곤 하신다.


결론적으로 매우 두 분 다 정정하시다는 것이다.


나는 두 분을 뵐 때마다 ‘나도 장수할 운명이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튼 그런데 어제.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의 원인(?)이 발생했다.


아빠가 우리 집 막둥이 밍구(프렌치 불독, 10세)한테 갑자기


‘아이고.. 밍구도 이제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엔 크게 대구를 하진 않았다..


그러고 오늘 아침에 눈을 뜨고 밍구와 산책을 나오는데


삐유우웅 하고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타인 및 타견에게 ‘얼마 못 살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장수를 하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이 아닐까 하고.


어제부로 나는 아빠가 밍구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처음 들었으니 밍구도 20년은 더 살 듯 싶다.


아빠는 마음이 여려 잃기 싫은 주변 소중한 사람들에게 오래오래 살라고 주문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주절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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