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과 잔소리가 통하지 않을 때

선생님이 너희와는 처음이라

by 유울

6학년인데 알파벳도 못 외운 학생이 있었다.

알파벳이나 영어단어를 외우는 것도 엄청난 시간이 걸렸고, 기껏 열심히 외워도 내일이면 잊는다.

영어 수업 시간에는 듣고 말하거나 읽거나 쓰는 활동들이 전혀 되지 않아서 멍만 때린다.

다른 과목들은 이해도 잘하고 상식도 풍부한데, 영어는 갓 배운 학생의 수준이어서 너무 안타까웠다.

영어도 조금만 더 노력하면 잘할 수 있을 텐데.




월수금 아침활동 시간에 영어단어 시험을 봤다.

시험 보기 전날 단어 10개를 미리 외워오고, 1교시 시작 10분 전에 시험을 본다.

내년이면 중학생이 되는데 근처에 학원도 없고 사교육을 안 받는 학생들이 많아서,

학교에서라도 더 봐줘야 할 것 같아서 시작한 시험이었다.

전날부터 아침시간까지 영어단어를 열심히 외우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이 학생은 아침 시간에만 단어를 외웠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8개 이상을 맞는데, 이 학생은 매번 1,2개만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학생이 3문제를 맞혔고, 이 일이 칭찬을 해줄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다.

작년에 2학년 아이들에게 그랬듯이, 내가 칭찬을 해주면 이 학생은 더 열심히 할 것이고, 그럼 실력이 쑥쑥 늘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나의 완벽한 오산이었다.

10개 중 3개를 맞힌 걸 칭찬해 주니, 이 학생은 그 뒤로 제일 짧은 단어 3개만 외워왔다.

그 뒤로도 몇 달간, 나는 칭찬을 하고 이 학생은 3개만 외우는 일이 반복됐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잔소리로 작전을 변경했다.

그랬더니 숙제도 해오고 외워오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나는 잔소리를 해도 숙제를 안 해 오는 이 학생에 대해 신뢰를 잃어갔고, 화를 내는 날이 많아졌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음 짓는 일이 없어졌다.

당연히 칭찬할 점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알파벳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이 학생이 이해가 안 되고 앞날이 걱정될 뿐이었다.




어느 날, 기초 학력 컨설팅을 받다가 이 학생에 대한 고민을 의논드리게 됐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교육과정 상의 목표는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는 데 있지 않고, 더 나은 인간이 되는 데 있어요. 교과 공부는 학생들이 인간으로서 성장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에요.”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말씀을 듣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아, 나는 그동안 너무 지엽적인 사고를 하며 이 학생과 나를 닦달하고 있었구나.’


“그 학생은 다른 교과는 잘하는데, 왜 유독 영어는 싫대요?” 그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나는 그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왜 영어를 싫어하는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나도 학생에게 궁금한 점이 있었지만 질문의 초점이 선생님과는 달랐다.

나의 의문은 ‘이 학생은 다른 교과는 잘하면서, 왜 영어를 못할까?’ 였으니까.


그 컨설팅을 받은 뒤로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못하는 것을 해내는 경험, 나도 하면 할 수 있다는 경험, 어렵지만 해냈다는 경험.

그래, 난 내 학생들이 이런 경험을 하길 바랐던 것이지 영어단어를 빠르게 많이 외우는 천재가 되길 바랐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학생의 입장을 더 이해하고 있어야 내가 더 적절하게 지도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 컨설팅을 받은 바로 다음날, 그 학생에게 물어봤다.

“00아, 너는 왜 영어가 싫어? 싫어지게 된 계기가 있어?”

그냥 싫다고 말을 하던 학생이, 나의 끊임없는 질문 공세에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한글에서 ㄱ은 그냥 [그] 발음만 나는데, 영어에서는 발음이 너무 다양해서 어려워요.”라고 답했다.

아, 이거였구나.


학기 초에 알파벳 공부와 파닉스 공부를 함께 시켰지만, 학기 초에 외운 파닉스는 당연히 다 잊은 상태였다.

그리고 사실 파닉스는 달달 외우는 것보다는 다양한 단어를 접해보며 소리를 익히는 것이 더 기억하기도 쉬웠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단어장을 펴서, 같은 알파벳이지만 단어마다 어떤 소리가 나는지 이야기를 나누며 단어를 함께 외웠다.


같은 단어를 일주일 동안 보고 있어서 그런 건지, 파닉스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아서 그런 건지,

이제 이 학생은 12개 중에 10개를 맞는 경지에 이르렀다.




잔소리도, 칭찬도 통하지 않던 학생에게는 그 마음과 생각을 알아채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학생의 어려움에 관심을 주고 어려워하는 마음에 공감하며, 학생의 인간적인 성장을 목표로 하며 지도를 하니, 나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관심이고 걱정이라는 이유로 학생을 닦달하던 내가, 이 학생이 어제보다 조금은 나아졌다는 안도감도 느끼게 됐다.


“선생님도 네가 어려워하는 걸 알아. 네가 힘들다는 걸 이해해. 그래도 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테니까, 선생님이랑 하나씩 같이 해보자. 처음에는 3개만 맞았지만, 지금은 10개나 알게 되었잖아.”


학생을 이해하고 믿고 기다리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저만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만 보이는데, 이 아이는 내 뒤에서 장난도 치고 멀뚱멀뚱 서 있다가 아주 느릿느릿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속이 꺼멓게 타 들어가서, 얼른 오라고 재촉도 했다가, 잘한다고 칭찬도 하며 앞으로 끌고 가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내가 그런다고 학생은 내가 원하는 속도로 빠르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냥 그 학생을 이해하며 그 속도에 맞춰서, 기다려주어야 한다.

기다리다 보면, 딴짓하던 그 학생도 어느새 내 곁에 부쩍 다가와있을 테니.

keyword
이전 03화잔소리쟁이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