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희 언니께 (첫 번째 편지)
제가 시댁에 몇 달째 가지 않아서 어머니께서 많이 속상해하시고, 언니가 옆에서 고모가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걱정하시는 거 알고 있어요. 언니가 암만 그래도 네가 맏며느리인데 그딴 식으로 행동해서야 되겠느냐고 전화에 대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제가 어떤 태도를 취해도 전화로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을 잘 전달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저도 흥분해서 실수하게 될까 봐 걱정이 돼 부득이하게 언니께 편지로 제 마음을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제가 시댁에 발을 끊게 된 결정적인 계기로 무엇을 꼽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생각나는 대로 말씀드리면 어머니께서 저에게 살림을 가르치신다고 가족들 모인 데서 자주 큰소리를 내시기도 했고, 굼뜨게 행동하는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지셨는지 제 등짝을 후려치시는 일도 자주 있었어요. 물론 저는 몇 번이나 우리가 아무리 허물이 없는 사이라도 때리지 마시라고 어머니께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저를 딸 같은 며느리라고 하시면서 그게 별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더군요. 어머니께서 연세가 많아지시면서 당신의 어떤 점이 좋지 않은 습관이라는 것을 알게 돼도 단번에 고치기가 쉽지 않으시다고 하셨어요.
어머니께서 혼내시면 빨개진 얼굴로 잠깐 눈물을 글썽거려도 어쩔 수 없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저에게 어머니께서는 "너는 뒤끝이 없어서 좋다."라고 하셨어요. 오히려 정호가 비명을 지르듯이 할머니 밉다고 소리치니까 ‘하이고, 내가 아들이 없었으면 서러워서 어쩔 뻔했냐?’고 말씀하시면서 웃으셨어요. 정호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제야 정신이 들어 주위를 들러보니 일그러진 동서의 얼굴이 보였고, 그 표정을 들켰다는 것을 알고 동서가 당황해서 얼른 화장실로 들어가 숨더라고요.
언니도 어머니께 들어서 아시겠지만 저는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였기 때문에 엄마와 자식 관계라는 것이 어떤 건지 잘 몰라요. 정호와 민호를 키우면서도 제가 놓치는 부분이 있을 거라는 두려움과 걱정이 늘 있었고, 어머니와의 관계를 통해 ‘엄마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제가 딸처럼 느껴져서 그러신다고 말씀을 믿어왔는데 어머니께서 남편의 등짝은 단 한 번도 때리신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오히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제가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시댁에 오가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어요. 아니 오히려 아이에게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다른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이 너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는데 시댁에서 제가 굴욕적으로 미소 지었던 상황이 떠오르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습니다. 정호가 학원에서 돌아왔어요. 다음 편지에서 이어서 쓸게요.
2019. 4.5. 윤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