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닮은 그녀. 그녀를 닮은 고양이
그날은 비가 왔다.
때늦은 장마가 끈덕지게 들러붙던 날. 태양은 구름의 기세에 등을 펴지 못한 채, 자기의 본분을 잊고 오랜 시간 자취를 감추었던 날. 이런 날은 아침부터 마음이 분주해진다. 분주한 마음에 비해 몸은 더디어서 문제지만.
며칠 전 출근길에 운전하며 가다가 꽉 막힌 터널 안에서 급작스럽게 공황증세가 올라왔다. 요 며칠 일에 치이고, 아이들이 번갈아 가며 아파 밤새 간호하느라 몸 상태가 너덜너덜해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반갑지 않은 녀석이 하필이면 운전 중에 터널 안에서 오신 것이다. 당황하지 않은 척했지만 바쁘게 움직이는 손. 라디오 볼륨을 최대한 크게 틀어놓고 창문도 열어 놓고, 남편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누구하고든 말을 이어나가야 이 암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았지만 남편은 회의 중이니 잠시 후에 전화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때부터 공황증세는 점점 거세어져 갔다. 불안해서 운전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지만 내가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최대한 정신이 한곳에 집중되지 않도록, 큰 소리로 말도 안 되는 노래를 부르며 여차여차 터널을 빠져나왔다.
'휴우, 살았다.'
그 후로 나는 운전대를 놓았다. 주인을 잃은 민트색 레이 소형차는 지하 주차장에서 홀로 잠을 자야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앞으로 운전은 못 할 거 같으니 이제 그만 차를 팔자며 남편은 다그쳤지만 오랜 세월 함께했던 작은 애마를 차마 보낼 수가 없었다.
"운전 다시 할 수 있어. 할 거야. 조금 더 놔둬 봐."
지금 팔아야 감가상각이 덜 되어 그나마 제값을 받을 수 있을 거라며 남편은 아파트 대출금 이자까지 들먹거렸다.
'그래, 6개월이면 많이 기다렸다. 보내자. 나의 고마운 민트색 꼬마 차야. 그동안 고생 많았어. 좋은 주인 만나.'
이게 뭐라고 마음이 출렁대는 건지. 떠나는 차의 뒤꽁무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꼬마 차를 처음 만나 설렜던 날, 꼬마 차에 꼬꼬마 두 녀석을 태우고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던 날, 꼬마 차와 함께 고속도로를 달려봤던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잘 가. 고마웠어.'
그날 내가 그토록 아팠던 건 더 이상 민트색 차를 보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공황이란 녀석 앞에 운전대를 다시 잡지 못할 만큼 처참히 무너진 나를 받아들이는 게 힘겨워서였다. 차를 몰 수 없게 되자 출근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아침에 조금 더 서둘러야 한다는 의미다.
비가 오는 날, 시내버스 안은 총, 칼이 없는 전쟁터와 다름없다. 분주하게 열리고 닫히는 문. 그때마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 사이에 크고 작은 실랑이. 젖은 옷에서 풍기는 비릿한 물 냄새와 질척이는 버스 바닥. 채 마르지도 않은 우산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빗물.
다시 숨통이 조여왔고 나는 두 정거장도 미처 가지 못하고 버스에서 급하게 내렸다. 그리고 오래가지 못해 직장을 그만두었다.
"채빈아, 뭐 해? 나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주어진 시간이 많으니까 감당이 안 되는데. 심심해서 집 안을 그냥 서성대고 있네."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나에게, 갑작스럽게 안겨진 시간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써서 생산적인 결과물을 내는 데 초점을 맞추어 살아왔기에 이렇게 빈둥거리는 시간이 아깝고 어색했으며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 시간을 누려봐. 넷플릭스에 인기 드라마 완결편까지 나왔더라. 정주행해. 심심할 틈이 어딨어. 애들 곧 집에 들이닥칠 시간이다. 최대한 누려야 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친구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일목요연하게 알려주었고 나는 쓴웃음을 짓고는 전화 통화를 마무리했다. 심심한 사람을 구제해 주기 위해 그 친구는 한 번씩 나를 집으로 불렀는데, 그 집에 들어서면 '슈가'라는 이름을 가진 달콤 보송한 고양이가 아마도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건지 꿈쩍도 하지 않고 잠을 잤다. 그러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무심하게 다가와서 알은체를 해주었다. '인간 친구야, 반갑다.' 그러면 나는 달콤한 고양이를 어루만지면서 친구와 내가 주로 이야기를 나누던 식탁으로 자연스럽게 가서 앉았다. 늘 그렇듯 그곳은 정돈이 잘 되어 있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 모습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친구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 나는 식탁 위에 쌓여 있는 책들을 들춰보다가 개중 관심 가는 책에 대한 질문을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친구는 책을 읽으며 느꼈던 생각과 감정을 나눠주었다. 분명 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졌고, 현 주부로서의 역할도 같았는데 이 친구에게는 나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품격과 여유가 흘러넘쳤다. 이 친구 집에만 다녀오면 은은한 풀 내음이 내가 가는 길까지 따라왔다.
고양이의 느긋함을 닮은 그녀. 그녀를 닮은 달콤한 고양이. 서로가 닮아서 끌린 걸까? 살아가다 보니 닮아진 걸까?
그녀의 고양이 슈가와 그녀를 생각하니 따스한 햇살에 슬며시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도 저들처럼 살고 싶었다.
표지 사진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