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동물 안 좋아하지?
어릴 적부터 말 못 하는 동물에게 마음이 늘 쓰였다. 앙증맞고 귀여운 모습에 끌렸다기보다 그들의 약함을 지켜내야 할 의무가 아니 부채가 나에게라도 있는 거마냥 느껴졌다. 내가 결정적으로 이 약한 것들에게 마음을 깊이 쏟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누가 그랬던가? 못 하게 말리면 그 마음의 크기는 배가 된다고.
어릴 적 내 간절한 소원은 강아지를 키우는 것이었다. 잠깐이었지만 이 꿈이 실현된 적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일은 내 평생에 트라우마로 남겨졌다.
키웠다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일주일의 기간, 나는 삐삐와 행복했었다. 학교를 갔다 오면 삐삐는 작은 꼬리를 깜찍하게 흔들며 반겨주었고, 어디를 가든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삐삐는 잘 때도 내 옆에 꼭 붙어있었는데, 들숨과 날숨에 볼록해졌다 꺼져가는 삐삐의 배를 보며 나는 생명의 존귀함을 스스로 터득했다.
"이거 가지고 가. 그릇이야. 똘이 참 귀엽다. 잘 키울게."
배변을 가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삐삐는 엄마에 의해 그를 키우겠노라 의사를 밝힌 내 친구 집에 보내졌다. 동물을 데려오면 건네준 사람에게 그릇을 줘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펼치는 친구 어머니 앞에 나는 앉아 있던 중이었다.
'삐삐가 똘이가 됐네.'
국민학교 3학년 아이가 할 수 있는 건 다른 사람 품에 안겨있는 삐삐와 눈을 마주치며 하루아침에 내 강아지 삐삐가 똘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쿵 내려앉는 거뿐이었다. 생경한 그 모습은 마치 흐릿한 세상을 더듬는 꿈속 같았다. 종지 그릇 하나, 과일 접시 하나, 유리컵 두 개가 담긴 봉지를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동안 눈시울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참았던 눈물은 한순간에 터져버렸다. 눈물은 잠그는 방법을 모르는 듯 흘러내렸고, 그렇게 한참을 밖에서 서성이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다. 삐삐가 없는 집은 쓸쓸하다 못해 암흑천지였다
"엄마, 아줌마가 그릇 줬어."
"뭐, 이런 걸 줬다니?"
어떠하든 상관없다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그릇을 받아 들고는 다시 저녁밥 만들기에 여념 없는 엄마가 너무 미웠다. 내 마음도 몰라주는 엄마가 삐삐의 마음까지 알리는 턱도 없었다. 그 후로 집에서 삐삐의 흔적은 빠르게 사라졌고, 그 모습이 너무도 천연덕스러워 삐삐가 우리 집에 잠시 있었던 게 맞는지조차 생소해지려 했다.
"삐삐, 아니 똘이 잘 지내?"
학년이 바뀌어 다른 반이 된 친구를 한동안 보지 못하다가 동네에서 만났다. 한참을 쭈뼛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뗀 친구의 말은 내 눈과 귀를 번뜩이게 했다.
"똘이 시골에 갔어. 3개월 지나니까 덩치가 산만 해지더라. 엄마가 더는 못 키우겠다고 해서 똘이는 시골 할머니 집으로 보내졌어. 걔 똥개 맞지?"
그 얘길 듣고 있자니 두 해 전, 시골 큰 이모네 집에 일가친척들이 모였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 아침도 누렁이와 논두렁에서 실컷 뛰어놀고 돌아온 직후였다. 마당에선 모락모락 장작불이 타올랐고, 나는 장난스레 누렁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오늘은 뭘 먹어?"
어른들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오늘? 오늘은 개잡는 날이지."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묻기도 전에 누렁이는 순식간에 어른 사내들에게 붙잡혀 몽둥이에 묶였다.
나는 놀란 눈으로 누렁이를 바라봤다. 아까까지도 내 발밑을 졸졸 따라오던 그 강아지가,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게 꼬리를 흔들던 그 녀석이, 지금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안 돼! 누렁이야!"
내가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이미 어른들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누렁이는 필사적으로 울부짖었고, 나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작은 몸으로 뭐라도 해보려 했지만, 세상은 나보다 훨씬 크고 무거웠다.
그날 저녁, 친척 어른들은 마당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나눠 먹었다. 평소처럼 웃고 떠드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숟가락을 들 수 없었다.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내 안에서 무언가 부서지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항상 지킬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세상은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크고 잔인할 수도 있다는 걸.
친구로부터 내 강아지 삐삐가 몇 개월 만에 시골로 보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삐삐도 누렁이 신세가 될 것만 같아 심장이 요동쳤다.
'내 가여운 강아지. 내 사랑스러운 강아지. 삐삐야.'
"엄마는 동물 안 좋아하지?"
이사 간 집으로 겸사겸사 놀러 온 엄마에게 나는 물었다. 강아지보다 고양이를 더 좋아하지 않는 엄마였다. 고양이를 키우는 내가 달가워 보일 리 없었다.
"엄마도 동물 좋아해. 귀엽잖아. 베리야, 이리 와봐."
베리를 쓰다듬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낯설어 당혹스러웠다. 엄마는 모르겠지. 어릴 적, 작은 강아지를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배웠던 내가, 다시 강아지를 통해 생명은 결국 한 줌의 재밖에 안 되는 허무한 인생임을 깨달았다는 사실을.
'넉넉지 않은 살림에, 제멋대로인 아빠 때문에 힘들었던 거지? 작은 생명을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게 버거웠던 거지? 엄마도 원래 동물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삶과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했던 엄마의 그 시절을, 내 나이 마흔이 넘어 보니 이해가 안 되는 것만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