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잡는 수영, 그래서 수영
"10분 후에 집 보러 갈 수 있어요?"
부동산 여사장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확연히 달랐다. 부동산 경기에 먹구름 낀 날이 연이으며 뜸했던 전화였다. 느닷없이 들려온 전화 속 목소리는 한 톤 반이나 올라간 다급하고도 흥분이 섞인 아우성 같았고, 그 목소리에 나도 덩달아 들썩였다.
여자의 직감은 내림받은 무녀보다 신속하고 예리했다. 여사장이 데리고 온 중년 부부는 우리 집에 들어오자마자 흡족한 눈빛을 뿜어댔다. 아이보리와 화이트가 섞인 페인트 질감의 거실 벽지를 꽤 오래도록 응시한 다음, 작은 방 천장에 달린 색색의 회전목마 펜던트 조명에 그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안방 붙박이장을 하나씩 열어볼 때는 내 속을 들여다보는 거 같아 무안했으나 그들은 그것의 쓸모에 꽤나 만족해하는 거 같았다.
"집이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네요. 팔기에 좀 아깝겠어요."
갑작스러운 중년 부부의 방문 후 우리에게는 한 달 반의 시간이 주어졌고 그 후에는 거처를 옮겨야 했다. 집은 살 때도 팔 때도 못내 아쉽다. 오래 살아보겠다고 정성 들여 전체 인테리어를 한 지 2년 남짓 되었을 뿐이니 집은 여전히 훤하게 반짝였다. 제값에 팔지 못한 거 같아 아쉬움이 남았지만 전체 인테리어를 해놨기 때문에 이런 불황 속에서도 집이 팔린 거라는 여사장의 직업적인 미소에 씁쓸히 화답하고는 우리는 새로운 거처를 찾으러 다녔다.
한 달 반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시간은 지나갔다. 사람이 한곳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시공간의 흐름을 놓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렇게 찾은 지방 소도시의 작은 집은 우리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는 이곳에 마지막 꽃잎 하나 구경하지 못한 채 이사를 왔다. 꽃잎이 떨어진 자리엔 연하고도 순한 초록빛 얼굴이 수줍게 올라왔고, 하루가 다르게 그 빛은 강성해갔다. 낯선 도시, 낯선 집, 낯선 사람. 모든 게 낯설 법도 한데 아이들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한 듯 보였다.
문제는 나였다!
내가 서둘렀던 이사였다. 빠르고 건조하게 흘러가는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훌쩍 떠나고 싶었다.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과 남편의 직장 거리까지 숙고하여 결정된 처소였다. 잘 적응할 수 있을 줄 았았는데, 아니 메마른 도시를 벗어나면 새로운 기쁨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만 알았는데 하루이틀 시간이 흘러도 새로운 희열은 찾아오지 않았고, 오히려 각박했던 도시 생활을 그리워하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 어색하게 일렁였다. 이사 후 우울증인가? 향수병인가? 갑작스럽게 변한 환경에 제일 적응 못 하는 건 나였고, 그래서 당황스러운 것도 나였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믿었지만 벚나무의 이파리가 가지를 무성하게 덮는 날에도 마음은 제자리에서 더 나아가질 못했다.
하지만 수영,
이사 오기 전에는 1년이 넘도록 꽉 막힌 공립 수영장 회원 대기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맘만 먹으면 바로 강습을 받을 수 있었다. 자유 수영만 다니다 단체 강습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익숙지 않은 것의 두려움보다 설레는 감정이 앞서는 걸 보니 수영이라는 단어 자체에는 우울증도 도시 향수병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힘이 있는 듯했다. 수영 강습 개강일을 기다리며 자유 수영을 하기 위해 이곳의 수영장에 들어섰다. 이사 오기 전에는 모든 레인이 사람들로 늘 분주하게 돌아갔는데, 이곳은 수영장 레인도 샤워 부스도 평화 그 자체였다. 바깥과 연결된 통유리에서 들어오는 빛이 은은하게 수영장 내부를 휘감았고 물은 그 빛을 받아 고요히 넘실거리며 윤기를 드러냈다.
'수영장 낙원이 있다면 이곳인가?'
첨벙
스스로도 설명되지 않는 도시 향수병을 안고 물속에 들어갔다. 급하게 앞서지 않아도 되는 이곳에서 유유히 물속을 거닐다 보니 복닥거리던 마음의 소리는 서서히 물에 희석되었고, 알 수 없는 환희가 밀려왔다.
그래서 수영,
수영을 마치고 나오면 그전에는 샤워실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곳은 달랐다. 느긋한 물소리에 맞추어 여유 있게 씻는 사람들. 보드라운 성정은 여백 안에서 다듬어진다는 걸 어느 작은 도시의 수영장 샤워실에서 깨우쳤다.
수영장 밖으로 나오니 이 도시를 감싸는 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이름 모를 새 무리가 울창한 벚나무에서 지저귀는 소리와 햇빛에 일렁이는 바람의 소리와 하굣길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모두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왔다.
새들도, 바람도, 사람도 분명 그대로인데 몇 시간 만에 풍경은 달라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수영하러 간다.
사진 출처- pex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