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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사람

“ㅇㅇ씨는 참 아까운 사람이에요.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지금쯤 훨씬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거래처 사장님이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 말, 처음 듣는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악의가 담긴 말도 아니었다.


그저,
남들 눈에 내가 조금 고생스러워 보였던 거겠지.
조금 더 나은 선택이 있었을 거라는 말.
나보다 나를 안다고 믿는 어른들이 자주 하는 말.


며칠 뒤, 친구도 비슷한 말을 했다.


“넌 좀만 더 천천히 결혼했어도 됐잖아.
굳이 이렇게 일 벌여놓고 사는 거,
너랑 안 어울려.”


그 말들이
머릿속에 남았다.

아니, 단단하게 박혔다.




짱은 착한 사람이다.
묵묵히 일하고,
돈 쓰는 거에 인색하고,
허세 같은 건 없다.


가끔은
너무 무던해서
속이 타기도 했다.


나는 그런 짱을...
어느 순간부터
비교하기 시작했다


“쟤 남편은 회사도 그만두고 창업해서 대박났대.”
“쟤는 남편이 서프라이즈 여행도 보내준다더라.”


그러다 문득,
과거의 연인들이 떠올랐다.
허세 가득한 말들로
미래를 설계하던 사람들.
비싼 밥을 사주고,
근사한 선물을 쥐여주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 틈에 섞여
나도 어깨 펴고 살았던 시절.
누군가의 여자친구로 대우받으며
‘대단한 여자’인 척할 수 있었던 때.


그때의 내가
지금보다 더 나았던 걸까?




생각은 생각을 불렀고,
짱은 점점 작아졌다.


나는 짱이 해주지 못한 것들을 세기 시작했다.
못 해준 여행,
못 해준 선물,
못 해준 말들.

그리고 남들 다 하는,

나는 못해 본 결혼식.


그리고,
결국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 그냥,
가끔 그런 생각 들어.

조금 더 능력 있는 사람이랑 결혼했으면

지금보단 좀 덜 고생했겠다, 그런 생각.”




내가 그 말을 했을 때
짱은 숟가락을 내려놨다.


말없이
물만 한 모금 마셨다.


표정도, 말투도
평소랑 다르지 않았는데


그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응.
그랬을 수도 있지.”


그 말만 남기고
짱은 설거지를 하러 일어났다.


나는 그 자리에 앉은 채
숟가락을 손에 쥐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어느새 나는 잊고있었다.

짱은 날 살려준 사람.


내가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던 시절,


“살고 싶어서 사는 사람
몇이나 되겠냐”
내 어깨를 툭 치던 사람.


일 안 해도 된다고,
당분간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그냥
거기 있기만 해도 고맙다고
말해줬던 사람.


그렇게
나를 살게 만든 사람에게,


내가 고작

“다른 사람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말을 했던 거다.




그날 밤,
짱은 평소처럼 전기장판을 켰다.


내가 추워할까 봐
자기 쪽 이불 끝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게
그 사람의 방식이었다.


미안해도,
서운해도,
그럴수록
더 잘해주는 사람.




나는

그게 고마운 줄도 모르고


익숙하단 이유만으로
함부로 굴었다.


사랑은 어떤 순간엔
태도고,
반복이고,
참음이라는 걸


짱은
나보다 훨씬 먼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나는,
상처를 줬다.


그 사람이 해주지 않은 것들을 세느라,
그 사람이 날 위해 했던 일들은
하나도 세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이었으면...”
하는 말 한마디로,


짱이 지켜왔던 모든 다정한 날들을
무너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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