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그녀와 나는 근황을 나누며 울어버렸다.
글로는 다 풀지 못할 이야기들을 나누며,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먹다 그렇게 한라산에 가기로 했다.
긴 연휴가 다가오고 있었고 그래서 날짜는 쉬이 9월 28일로 정해졌다.
마치 1년 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아니면 옆 동네 둘레길을 걷자는 듯 가볍게 정하고 가볍게 떠나기로 했다. 1박 2일의 한라산 등반을 위한 제주행의 시작은 이렇게 가벼웠다. 아니, 그 안에 담긴 우리의 마음은 억겁보다 무거웠으니 그 어느 여행보다 무거운 것인가.
'비가 온다는데?'
2년 전 내 인생 첫 한라산 등반도 그녀와 함께였더랬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는 백록담의 구름 담긴 물도 보았던 그때의 한라산.
하지만 이번엔 쉬이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나 보다.
'입산 통제만 아니면 돼!'
이 오름의 이유는 무엇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비워내기 위함이었으므로.
비 오는 한라산 등반 같은 걸 검색해 보고 우비를 주문하고 판초를 주문했다가 웬 천막이 와서 이건 도저히 입진 못하겠는 걸 하고 다시 환불을 신청하고 등산가방안에 지퍼백으로 여분의 양말과 등산복도 챙기고 나면 그저 끝이었다.
비 오는 한라산이라, 오히려 좋아. 내 정신건강도 같이 챙겨.
새벽 4시, 알람을 조용히 끄고 일어나 베란다 문을 열었더니 음. 폭우다. 혹시나 하고 한라산 국립공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입산통제는 보이지 않는다.
새벽 5시까진 시간당 25mm의 비예보가 있지만 이후부터는 강수량도 줄어든다.
기어가다시피 운전을 해 숙소 근처 돗새기김밥집으로 가 아침을 든든히 먹고, 정상에서 먹을 것도 야무지게 포장했다. 김밥집 사장님이 이제부터는 비가 오지 않을 거라며 안전히 등반하시라 했다.
다행이야!
새벽 6시, 계획보다는 약간 늦은 시각에 성판악탐방로 등반을 시작했다.
사방이 컴컴해 내딛는 내 발을, 멀리 있는 앞사람의 헤드랜턴을 눈 삼아 걸었다.
좀 전까지 세차게 내린 비로 등산로는 온통 물웅덩이.
찰방찰방 저벅저벅 작은 천이 되어버린 길을 조심히 걸어 올랐다.
2년 전엔 풍경이 더 예쁘다는 관음사코스로 올랐더랬다. 하지만 10월 말까지 그 코스는 보수공사로 부분통제가 되어 이번엔 성판악 코스로 오르기로 했다. 편도 9.6km 4시간 30분, 왕복 8시간 정도의 산행을 목표로 천천히 걸음걸음 내디뎠다.
서울에서도 난 비가 오는 날엔 등산을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일체유심조.
마음을 조금만 달리 먹으면, 내리는 비에 몸 한번 적시고 나면 비는 더 이상 존재감이 없어진다.
아니라도 어쩌겠어, 제주도까지 왔는걸.
게다가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 우비를 입지 않아도 될 정도로 줄어든 비, 긴 황금연휴 바로 전 주라 등반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까지 너무 좋았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걸음걸음이었다.
뿌연 안개와 점점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순간 기시감이 인다. 2년 전 딱 한번 보았을 뿐인데, 엊그제 만나고 오늘 또 만나는 느낌.
3시간 30분여 만에 한라산 정상에 도착했다.
지난번엔 줄이 너무 길어 찍지도 못했던 한라산 백록담 정상석 줄은 30초 컷.
기다리는 이들도 별로 없으니 서로 찍어주고, 같이 찍어주십사 하며 스무 여장의 사진도 남기는 행운도 얻었다.
오히려 좋아 2 모먼트.
백록담은 당연히 보이지 않고, 바람이 너무 세차 휘릭 날아가버린 모자를 주워 부여잡고 가족들과 영상통화도 하고 숨을 크게 두어 번 들이마시고 내쉰 다음 하산을 시작했다.
새벽 5시에 챙겨 온 김밥은 진달래 대피소에서 딱 맛있게 먹었다. 숙소 아래 편의점에서 산 귤마저 너무나 제주의 귤맛이었다. 서울에서 먹는 귤은 이맛이 아니야.
오후 1시. 우리는 만세를 외치며 등산을 마쳤다.
가야 할 곳도 보아야 할 것도 없이, 오로지 한라산이 주인공이었던 1박 2일 제주행.
같은 카페를 두 번가고 같은 해변을 두 번 걷고 찾아가 보니 일요일이 휴일인 식당엘 갔다가 아마 더 맛있었을 식당에 가 고등어회 소자를 시켰는데 대자를 주고는 한창 먹고 있으니 소자가 아니라 대자라는데 어떡하죠라고 하는 어벙벙한 아르바이트생에게 괜찮아요 대자 먹을게요 하고는 앞으로 1년 동안은 아마 고등어 안 먹어도 되겠다며 마지막 한 점까지 싹싹 집어먹은 한량 같은 여행.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도 마음이 둥둥 떠 잠도 오지 않았다.
1박 2일 동안의 모든 시간을 싹싹 그러모아 내 마음 깨진 틈을 메꾸어주었다, 내가 쌓은 6시간 30분의 걸음걸음으로.
떠날 수 있어 행복했고
걸을 수 있어 행복했고
다음이 있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