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20살 소녀의 사춘기

by 전태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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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포근해지고,

파란 잔디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젖소는 백 마리 남짓,

할아버지와 선민이 둘이서 목장을 돌본다.



할머니는 여전히 집안일을 맡고, 밥을 짓는다.

대부분의 일은 선민이 하루 종일 도맡아 한다.



그의 몸은 어느새 단단해졌다.
운동을 배우고 싶다며 권투와 유도를 배우기 시작하더니,

저녁 늦게까지 체육관에 머무른다.



밤 11시쯤 돌아오는 그를 보면 땀에 젖은 얼굴이 밝게 빛난다.

1층 식당은 지금 헬스클럽처럼 운동기구로 가득하다.
혼자 쓸 수 있도록 해준 공간이다.

키는 이미 180센티미터를 넘었다.



선민은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혹 떠나게 된다면, 나는 담담히 보내줄 것이다.

마당에는 봄꽃이 피고, 진돗개 한 쌍이 한가로이 돌아다닌다.
그 개들은 내가 심심하다고 하자, 선민이 선물해준 존재다.




할아버지는 곧 새끼를 낳을 거라며 웃으셨다.
커피를 한 잔 들고 테라스에 앉아 있으면,

세상 모든 평화가 내 곁에 머무는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어느새 열아홉 살 가을이 되었다.
물론 주민등록상의 나이다.

노부부는 이곳을 떠났다.
할머니의 병세가 깊어져 요양을 가신 것이다.



나는 퇴직금 명목으로 넉넉히 챙겨드렸다.
내가 이곳에서 태어난 열여섯 살 무렵이나,

지금 열아홉의 나이나
몸은 달라지지 않았다.
시간은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그 사이 선민은 완전한 청년이 되었다.
운동 실력은 이제 유도 2단, 태권도 2단, 합기도 2단이라 했다.
요즘은 복싱을 주로 한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오토바이를 한 대 사주었다.
125cc짜리, 당시에는 꽤 최신식이었다.



내년쯤 면허를 따면 내 차도 함께 몰 수 있겠지.

목장 일은 이제 마을에 사는 부부가 맡아준다.
그들은 출퇴근하며 일한다.


영어 선생님은 여전히 나의 친구처럼 지낸다.



함께 지내다 보니, 옷차림이 점점 자유로워지고 세련되어졌다.
백화점에서 산 옷을 선물하고,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주말에는 가끔 우리 집에 머물기도 했다.

영어선생도 미니스커트 입는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졌다.
할아버지는 그런 날이면 반찬을 더 많이 챙겨주셨다.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하지만 그 평화에도 그림자는 드리워진다.



어느 날, 목장 근처에서 밤마다 모닥불이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여자 혼자라 나서지 못했다.
성민이 밤 11시쯤 돌아오는데, 그 전에 불빛은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은 좀 더 일찍 와서 확인해볼게요.”
밤이 돼자 모닥불이 피어 올랐다.


그는 엽총을 메고 오토바이를 타고 갔다.
2층으로 올라가 망원경을 들여다보니, 남자 셋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성민의 모습도 보인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남자들이 달려들었다.
허공으로 총성이 울리고, 나는 놀라 신고를 했다.
몸싸움이 이어졌고, 내가 놀라서 허공으로 총 몇 발을 쏘았다.



잠시 후, 그들은 달아났다.

성민은 얼굴에 피가 묻은 채 돌아왔다.
나는 약을 발라주며 말했다.
“이 정도라 다행이야.”

다음 날 경찰이 범인들을 잡았다.



지명수배자 둘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근처 마을 출신으로, 시골에 숨어 지내던 중이었다.
경찰의 말에 따르면, 그날 나를 노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그날 이후로 한 가지를 결심했다.



‘이곳에서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일하는 부부에게 옛 노부부 숙소에서 숙식하며 지내달라고 부탁했다.



그해 겨울, 드디어 스무 살이 되었다.
1990년 1월 1일, 나는 성년이 되었다.
이제 내 이름으로 모든 재산을 관리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정식으로 이사장 취임식을 열어주었다.



시내로 가서 통장을 확인하니, 잔고가 30억을 넘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차를 마시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조만간 시내로 이사하려고요.”

7층 건물, 가장 번화한 거리의 한복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은 그 시절 드물었다.



1층은 식당과 스포츠 매장, 2층은 학원, 3층은 무용학원,
4층은 건설회사, 5층과 6층은 병원,
7층에는 변호사와 회계사 사무실이 있었다.
월세만 이천만 원이 넘는 건물이었다.



나는 변호사에게 말했다.


“시내 쪽 한옥이나, 근처 땅을 알아봐 주세요.”

"네 아가씨."


겨울이 지나면 진심으로 이사를 생각해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켠이 불편했다.
젖소들과 이 넓은 50만 평의 목장을 두고 떠난다는 건,
마음이 쉽지 않았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오니 8시였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던 찰나, 문이 열렸다.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성민이 급히 들어왔다.
잠시 서로 놀란 채 멈춰 섰다. 정지화면이 된것이다.
그의 눈에는 놀람과 당황이 보였다.



“아가씨, 젖소가 곧 새끼를 낳을 것 같습니다.”
나는 곧장 옷을 챙겨 입고 그를 따라갔다.
축사 안에는 어미 젖소가 고통스러워하며 누워 있었다.
성민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출산을 도왔다.



잠시 후, 새 생명이 세상에 태어났다.
젖소 새끼는 작은 다리로 비틀거리며 일어나
어미에게 다가가 젖을 물었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미소 지었다.


“그래, 아가야 잘 왔구나.”


그의 숙소 1층 식당에서 소주를 한잔 나누었다.



잔을 기울이며 바라본 성민의 얼굴은 금세 붉게 물들었다.


“성민아, 여자친구는 있니?”
내 물음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머뭇거렸다.



예전, 할머니 병원비로 힘들어하던 그 소년은 이제 없다.
이제 그는 안정된 일상과 여유를 가진 청년이 되었다.



“없어요. 그냥... 친구처럼 지내는 사람은 있습니다.”
“있으면 데리고 와봐. 내가 밥이라도 사줄게.”
“네, 아가씨.”


그는 쑥스럽게 웃었다.

몇살이니.?
“동갑이예요. 상고 졸업하고 지금은 공장 다녀요.
서울이나 광주로 취직 자리를 알아보는 중이래요.”



“진지하게 사귀는 거야?”
“아직은요... 잘 모르겠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나서며
가볍게 그를 안아주었다.



“우리 성민이, 정말 많이 컸구나.”

그의 몸은 단단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그 몸이 스치며,
이상하게 마음이 두근거렸다.



밤이 깊어 잠이 들었을 때,
이상한 꿈을 꾸었다.
햇살 속에서 웃던 성민의 얼굴이 보였다.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눈을 떴을 때, 방 안에는 아직 그 꿈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가슴 한켠이 오래도록 설레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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