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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 Jun 12. 2024

솔이의 베프

어제는 바람이 몹시 날카로웠는데 오늘은 퍽 순합니다. 어제보다는 강변 잔디밭에 산책 나온 개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붉은 개 모찌도 나와 있겠죠.

이주 전에 모찌 언니가 수줍게 말했습니다.

“솔이는 모찌의 베프예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제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말을 이었습니다.

“모찌는 솔이를 제일 좋아해요.”

“아, 예.”

저는 대답하면서,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그녀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붉은 개 모찌와 더는 얽히고 싶지 않다는 속마음을 숨겼어요. 사실 그녀와 그녀의 개 모찌는 강변 잔디밭에서 일어나는 많은 소란의 주범이거든요. 그 전날도 그녀와 다른 개엄마 간에 짧은 신경전이 있었고 그 불똥이 저에게로 튀었죠.


막 3개월이 된 백구가 왔을 때였어요. 어린 백구에게 강변 잔디밭은 개들과 사람들이 모여 있는 낯선 장소였나 봐요. 그래서 겁에 잔뜩 질려 있는데 모찌는 이런 백구를 따라다니면서 위협했어요. 모찌 언니는 나무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있었고요.

모루 엄마가 모찌 언니에게 다가갔어요.

“그쪽 개가 다른 개를 공격하지 못하게 해요.”

모찌 언니가 고개를 들었어요.

“뭐!”

모루 엄마가 씩씩거리며 되돌아왔어요. 그동안 문제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죠. 제가 모찌를 가로막았거든요. 그것조차 못마땅했는지 모루 엄마가 말했어요.

“다른 개를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보호자가 해야지.”

“모찌가 우리 솔이하고 잘 놀아서 겸사겸사 돌보는 거예요.”

“그러지 말고 보호자가 하게 말을 해 줘요. 내가 말했더니 ‘뭐!’하네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어서 못 알아들었을 수도 있어요.”

“아닌데? 들은 것 같던데?”

“모찌 언니가 다른 사람과는 말을 잘 안 해요. 그나마 말을 하는 사람이 나뿐인데.”

“그래서 좋아요?”

저는 기분이 나빴어요. 왜 제가 모루 엄마에게 이런 변명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왜 모루 엄마가 저에게 나무라는 말투를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저는 뜨악한 표정으로 새파랗게 어린 그녀를 쳐다봤어요. 명치에선 짜증이 부글부글 끓었죠. 그녀의 개 보더콜리 때문에 민원이 상당히 들어가는데 그걸 따질까? 하는 생각이 일순 들었어요. 아무리 순하다 해도 보더콜리는 큰 개이고, 산책하는 사람들은 큰 개를 풀어놓으면 싫어해요. 특히 한 여자분이 민원을 많이 넣는데 그 대상이 바로 보더콜리 모루였어요.

알고 보니 그 여자분에게 사연이 있었어요. 한 번은 그 여자분이 강변 산책로 끝에 있는 음악 분수대에 갔다가 커다란 개에게 물림 사고를 당할 뻔했대요. 보호자가 “안 물어요” 해서 안심하고 음악 분수대로 걸어갔는데 갑자기 개가 달려들었대요.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다가 뒤로 넘어졌고 겁에 질린 나머지 오줌을 질질 흘렀대요. “그러고도 살 거라고 기어서 도망쳤죠. 경찰이 왔을 때는 개하고 주인은 이미 도망가버리고 없었어요.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집으로 가는데 얼마나 수치스럽던지! 다 큰 어른이 바지에다 오줌을 다 싸고, 오줌 냄새를 풍기며 축축하게 걸어가고 있으니… 살다 살다 그런 참담함은 내 평생 처음이었어요.”

그 이후로 그 여자분은 큰 개만 보면 무섭다고 했어요. 보더콜리 모루가 목줄을 안 한 채 잔디밭을 뛰어다니고 있으면 그때 일이 생각나고 소름이 싸르르 돋으면서 걸음이 떼이질 않는다고 했어요.      


이런 사실을 그녀는 알고나 있을까요?

어떤 반려인은 보더콜리와 그녀를 다 싫어해요. 개나 주인이나 똑같이 ‘간섭쟁이’라면서요. 사실 그녀는 강변 잔디밭의 주인이나 되는 양 다른 보호자를 간섭하죠. 모루는 다른 개들이 어울려 놀 때 따라다니며 간섭하고요. 그 행동을 믹스견 시루와 푸들 코코처럼 모찌도 싫어해요. 솔이와 놀 때 모루가 따라다니면 송곳니를 드러내며 모루를 공격하죠. 모루 엄마는 그런 모찌를 경계하지만 모찌 언니는 그런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해명할까 말까?

저는 숨을 깊이 들이쉬면서 생각했어요. 많은 반려인이 모이는 강변 잔디밭에는 크고 작은 갈등이 일어나는데 금방금방 해결하지 못한 갈등은 대화의 벽을 만들고 뒷말이 되어 돌더라고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결국 저는 해명하는 쪽을 선택했어요.

“좋다기보다는 이해하려고 해요. 그동안 모찌 언니와 짬짬이 나눈 이야기를 종합해 보니 모찌를 입양한 건 언니가 아니라 엄마더라고요. 그런데 엄마는 직장에 나가야 하니 모찌 산책은 모찌 언니 담당이 되었죠. 모찌 언니가 하루 두 번 모찌를 산책시키는데 처음에는 엄청 짜증을 냈어요. 여기 모찌를 풀어놓으면 집에 갈 때까지 한 번을 보지 않았으니까요.”

모찌 언니가 여기 온 첫날이 기억나네요. 이게 딸 키우는 거랑 뭐가 다르냐며, 왜 내가 애를 낳아야 하냐며 고래고래 고함치던 그때요. 그 새뜻한 기억 속의 저는 모찌 언니가 새댁인 줄만 알았죠. 의논 없이 개를 입양한 남편에게 화가 난 거라고 짐작했어요. 그런데 차차차차 알아가다 보니 새댁이 아니라 대학을 갓 졸업한 취업 준비생이더라고요.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그때 그 상황이 더 이해가 되질 않았어요. 결혼 준비 중도 아닌 아가씨가 왜 엉뚱한 곳에 와서 애를 안 낳겠다고 선언했을까요. 모찌가 너무 싫어서 그랬겠지, 하고 억지로 이유를 이어 보지만 그래도 너무 앞서 나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은 지울 수가 없네요.

“그때 비하면 지금은 엄청 나아졌죠. 모찌가 똥 쌌다고 알려주면 달려가서 치우고, 며칠 전에는 장군이 아빠가 개 통제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정말 열심히 배웠어요. 장군이 아빠가 가고 난 뒤에 혼자 연습하면서 저한테 모찌를 잘 돌보고 싶다고 했어요. 처음엔 싫었는데 지금은 모찌가 정말 좋다고요. 휴대전화도 처음보다는 훨씬 덜 봐요. 어쨌든 모찌 언니가 노력하는 중이니 저도 모찌를 봐주려고 노력하죠.”

‘가끔 부담감이 확 올라오기도 하지만’이란 단서를 생략한 저의 긴 해명에 모루 엄마가 굳은 표정을 풀었어요.

“그러고 보니 모찌가 참 똑똑한 것 같아요. 저기 보세요. 보호자는 휴대전화만 보고 있는데 그 앞에서 모찌는 보호자를 지키는 것처럼 앉아있어요.”

“그렇죠. 그래서 모찌가 지 언니 말을 잘 안 들어요. 입질도 하고요.”

“개들이 아는 것 같아요. 보호자의 성향을.”     


이렇게 모루 엄마와 오해는 풀었습니다만, 모찌와 모찌 언니로 인한 소란은 그 뒤로도 자주 일어났어요. 소란이 반복될수록 제 마음에도 피로감이 쌓여갔죠. 모찌에게 신경을 쓰다 보면 정작 제가 돌봐야 할 솔이는 방치되기 일쑤였고요. 이런 저에게 솔이가 모찌의 베프라는 말이 앞으로 모찌를 더 돌봐달라는 부탁의 말로 들렸어요. 에휴.

모찌 언니가 특유의 더듬거리는 말투로 말했어요.

“어, 솔이는 몇 시에 나, 나와요?”

잠시 저는 망설였어요. 묻는 의도를 너무 잘 아니까. 찰나 거짓말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나 곧 마음을 돌려먹고 말했어요.

“요새는 3시에서 4시 사이에 나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추워지고 있으니 점점 빨라질 거예요. 저는 햇살이 있을 때 나오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러고 솔이를 따라 걷는데 모찌 언니가 계속 따라왔어요.

“솔이도 산책 가려고 하면 어, 그러니까 반응해요?”

“그럼요. 낑낑대죠.”

“쟤는 방방 뛰고 나, 난리예요.”

“너무 좋은가 보네요.”

“근데 물어요.”

“어디를?”

“손도 물고 어, 다리도 물고 어, 발꿈치도 물고.”

“그러면 안 되는데?”

“그렇죠? 그래서 방에 가두는데.”

“잘했어요. 입질은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해요.”

“그렇죠?”

“큰일이네. 모찌가 언니한테 입질을 해서.”

“걱정이에요.”

그러고 말이 끊겼어요. 우리 둘 다 말없이 걷는데 잠시 뒤 모찌 언니가 말했어요.

“그때 고마웠어요.”

“네?”

“그때요. 어, 모찌가 남의 공을 물고 갔다고 아, 알려줘서. 어, 다른 여러 가지도….”

모찌 언니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그 말이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한 게 아니라 오히려 무겁게 했어요. 부담감과 피로감에 이제 미안함까지 더해졌으니. 저는 더욱 깊어진 한숨을 숨기고 어색한 웃음을 입술에 담았어요.    

  

예상했던 대로 다음 날부터 모찌는 솔이가 강변 잔디밭에 나오는 시간에 맞추어 나왔어요. 모찌 언니는 저랑 같이 솔이와 모찌를 따라다니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나 그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어요. 제가 다른 반려인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나무 의자로 가서 휴대전화를 보았어요. 그 시간 동안 모찌는 오롯이 제 몫이 되었고요.

또 모찌 언니가 나무 의자로 갔는데, 그 틈에 모찌가 남의 공을 빼앗아 도망갔어요. 사실 여기 잔디밭에서 개가 다른 개의 공을 빼앗아 가는 일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에요. 대부분의 개는 조금 가지고 놀다가 호기심을 사르면 공을 내버려 두니까요. 그 틈새를 노려 보호자는 공을 회수하죠. 그러나 모찌는 빼앗아 간 공을 잘근잘근 물어 씹어서 조각조각 내버려요. 한 개에 오천 원짜리 공도 서슴없이 마구.

공을 물고 간 모찌가 잔디밭 한쪽에 자리를 잡았어요. 그 모습을 공의 주인 봄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네요. 봄이 엄마는 발을 동동 굴려요.

“어제 막 내린 건데! 비싸서 수십 번 고민하다가! 주문을 누르려니 손이 발발 떨리더라고요.”

“어서 가서 말해요.”

“말을 해도 말을 안 해. 이씨.”

할 수 없이 제가 모찌 언니에게로 갔어요. 모찌 언니는 휴대전화를 볼 때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어서 꼭 옆에 가서 어깨를 두드려야 해요. 모찌 언니가 저를 바라보네요. 저는 모찌를 가리켰어요. 모찌는 두 발로 분홍색 공을 야무지게 움켜잡고 송곳니를 갖다 대려고 해요.

“안 돼, 모찌!”

모찌 언니가 벌떡 일어섰어요. 모찌가 잽싸게 공을 물고 튀었어요. 모찌는 저를 잡으려는 언니를 피해 요리조리 도망쳤어요. 봄이 엄마는 주먹을 쥐고 그 장면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있어요. 그 모습이 안쓰러워 저는 저도 모르게 도망치는 모찌를 쫓아가요. 결국엔 모찌를 붙잡아 모찌 언니에게로 가니 모찌 언니가 모찌가 입에 물고 있는 공을 빼앗아요. 화가 난 모찌는 언니의 집게손가락을 물어버려요.

실랑이 끝에 오천 원짜리 공은 주인에게로 되돌아가요. 봄이 엄마는 고맙다고 말하고 공을 가방에 넣으며 봄이에게 말해요.

“안 돼. 모찌 갈 때까지 기다려.”

그제야 저는 방치되어 버린 솔이를 찾아요. 아, 다행히 솔이는 저쪽에서 물을 얻어먹고 있네요. 불쌍하게도 엄마 없는 개처럼.

    

모찌와 함께 한 후로 솔이는 다른 개의 물을 얻어먹고 솔이의 물은 모찌가 먹어요. 모찌의 물은 모찌 언니의 가방 안에서 나오지도 않은 채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고요.

날이 갈수록 저는 이 시간이 부담스러워졌어요. 이미 예상했던 바지만, 예상했던 바라고 해서 피로감이 덜하진 않았어요. 아니 예상했던 바라 더한지도 모르죠. 모찌를 내버려 두면 되지 않냐고요. 그렇게도 해 봤죠. 그러나 그러는 맘 역시 편질 않았어요. 모찌와 노는 솔이까지 내버려 두게 돼버리니까.     


어제는 모찌가 결석했어요. 강변 잔디밭에 나오지 않았어요. 바람이 심해서 안 나왔나, 하고 저는 짐작했죠. 그런데 제 마음이 너무 편안한 거예요. 모찌가 없으니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고 솔이만 지켜보면 되니까요. 푹신한 소파에 앉은 것 같은 마음으로 봄이 엄마와 수다를 떨었죠.

하지만 바람이 잦아든 오늘은 모찌가 출석하겠죠. 어제의 평온함을 맛본 제 마음은 예전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해요. 그 마음 따라 저는 강변으로 내려가지 않고 녹지공원을 계속 걸어요. 녹지공원의 분수대를 넘어 맨발로 걷는 지압 길이 있는 쪽으로 가면서 제 마음에 인 혼란을 가라앉히려 애써요.

그때 솔이가 무슨 냄새를 맡았나 봐요. 땅에 코를 대고 킁킁 킁킁. 어떤 냄새를 따라가요. 녹지공원 바깥 인도에서 풍겨오는 냄새일까요. 한 번도 땅에서 코를 떼지 않은 솔이가 인도로 갑니다. 아니, 인도에서 풍겨오는 냄새가 아닌가 봐요. 솔이가 인도를 가로지르네요.

도로 가에는 주차선이 그어져 있고 대형트럭 두 대가 틈을 두고 주차되어 있어요. 그 틈에 커다랗고 시커먼 얼룩이 있어요. 아마도 기름이 유출되어 생긴 얼룩이 아닐까, 저는 추리해요. 솔이가 걸음을 멈춰요. 목덜미의 털이 우르르 일어서요. 들어 올린 발을 쉬이 내려놓지 않아요. 내려놓을까 말까, 무수히 망설여요. 두 눈은 얼룩에 꽂혀 있어요.

저는 풋 웃어요.

얼마 전 솔이가 검은 비닐봉지를 보고 겁에 질렸던 일이 떠올라요. 바람을 잔뜩 품은 비닐봉지가 살아 있는 듯 이 꿈틀거리자 솔이는 줄행랑을 놓았어요. 비닐봉지를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짐승으로 여기는 듯이. 저는  바람 따라 꿈틀거리는 비닐봉지를 발로 제압하고 나서 솔이를 불렀어요. 수없이 망설인 끝에 멈칫멈칫 다가온 솔이는 멀찍이서 검은 비닐봉지의 냄새를 맡았어요. 그러고 나자 안심이 되는지 곤두선 목덜미의 털을 누이고 내렸던 꼬리를 치켜올렸죠.

“야, 기름 얼룩이야. 겁내지 마.”

그러나 솔이의 온 신경은 그 얼룩에 오롯이 집중되어 있어요. 저는 그냥 지켜보기로 해요. 그때처럼 기름얼룩을 발로 제압한들 가시적인 효과가 없을 것 같아서.

긴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공포스러운 얼룩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가는 솔이. 신중하게 들어 올렸다가 두려운 듯이 발을 내려놓는 행동은 마치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서 걸어가는 슬로모션을 같아요. 드디어 솔이가 얼룩의 냄새를 맡아요.

킁킁.

다음 에이, 아무것도 아니네, 하고 돌아서는 솔이를 저는 기대합니다. 목덜미의 털이 무안한 듯 웃고 다리 사이로 숨었던 꼬리가 부끄럽게 나오는 상상을 합니다.


그러나 솔이가 홱 돌아서더니 부리나케 도망칩니다. 꼬리는 다리 사이에 숨은 채 있고 목덜미 털은 등 털까지 일으켜 세웠어요. 자동 리더줄이 끝까지 풀립니다. 저는 우두망찰 서 있습니다.

솔이가 땅바닥을 바득바득 깁니다. 힘대로 줄을 끌어당깁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온 힘을 다합니다. 보통 땐 자동 리더줄이 끝까지 풀리고 제가 따라가지 않으면 솔이는 뒤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저에게로 되돌아옵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러는 걸까요?

저는 얼룩을 다시 봅니다. 그저 검은 얼룩일 뿐입니다.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시커멓고 커다란 모양이 사나운 동물처럼 생겼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일렁이는 선을 지닌 평범한 타원입니다. 그런데 저것이 솔이는 왜 무서울까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저는 솔이에게로 걸어갑니다. 저의 보폭만큼 줄에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만큼 솔이는 앞으로 기어갑니다. 여전히 뒤는 돌아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곳을 벗어납니다. 솔이가 걸음을 늦춥니다. 느려진 솔이의 걸음만큼 리더줄이 되감기고 저는 솔이와 가까워집니다.

“왜 그래, 솔이야?”

솔이는 대답이 없습니다. 대답을 듣지 못한 저는 뒤돌아서서 다시 그곳을 바라봅니다. 기름 냄새가 그렇게 무서웠니? 고개를 돌린 저는 솔이에게 눈으로 묻고, 두려움이 가득한 솔이의 눈은 제가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을 합니다.

      

그냥 녹지공원 산책을 포기합니다. 녹지공원에서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얼룩 소동이 마음을 더 소란스럽게 해서요. 마음 정리는 내일로 미룹니다.

푸른 신호등이 오고 나서 1에서 5까지 센 후 8차선 도로를 건넙니다. 바로 어제도 무단질주를 하던 승용차 한 대가 신호를 받고 건널목을 건너는 할아버지 앞을 스치듯이 지나갔거든요.

강변에 가니, 어제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노란 잔디의 머리채를 잡아 뜯던 바람이 오늘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살살 기네요. 우리는 개들이 모이는 곳으로 천천히 걷습니다. 가까이 가면서 보니 모찌가 없네요. 아직 안 온 걸까요. 더 가까이 가니 모찌 언니가 나무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럼 어딘가에 모찌가 있겠죠? 저는 눈으로 모찌를 찾습니다. 모찌 언니가 앉아있는 나무 의자 아래 숨은 걸까요, 수양버들나무 뒤에 숨은 걸까요.

“일찍 왔네요. 모찌는요?”

모찌 언니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통곡합니다.

“엉엉엉, 엉 엉엉엉엉….”

놀란 저는 코코 엄마에게 눈으로 묻습니다. 왜 이래요?

“아까부터 솔일 기다리고 있었어요. 모찌가 죽었대요.”

“예에? 어쩌다가요?”

“교통사고로요.”

“언제요?”

“어제요. 왜 녹지공원 분수대 너머 지압하는 데 있잖아요. 그쪽 도로에서. 깽! 하는 비명이 들려서 보니 모찌 같은 애가 쓰러져 있는 거예요. 보호자가 막 달려가는데 모찌 언니가 아닌 거예요. 그래서 모찌가 아닌가 보다, 했거든요. 그런데 모찌였어요. 피가 흥건했어요. 모찌를 도로 밖으로 들어서 옮겼는데 거기도 피가 흥건하고.”

“혹시 그곳이 덤프트럭이 주차된 사이예요?”

“맞아요, 거기.”

아! 그 얼룩이 기름 얼룩이 아니었구나.

주춤주춤 모찌 언니 옆으로 가서 앉은 저는 머뭇머뭇 모찌 언니의 어깨를 안습니다. 모찌야, 모찌야, 이름을 부르면서 모찌 언니가 더 크게 통곡합니다. 손으로는 앞에 앉아있는 솔이를 쓰다듬습니다.

“솔이야, 엉엉, 미안해. 엉엉, 모찌를 내가 잘 돌보지 못해서, 엉엉엉.”


통곡의 시간이 지난 뒤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제 모찌 언니는 약속이 있어서 대신 모찌 아빠가 산책을 나왔답니다. 모찌 아빠는 모찌를 데리고 녹지공원을 뱅글뱅글 돌았는데 잠깐 한눈팔다가 모찌 줄을 놓치고 말았대요. 그 순간 모찌가 8차선 도로로 뛰어들었고 달리는 승용차의 뒷바퀴에 부딪혔답니다.

말을 하는 동안 그녀의 손이 다른 손을 물어뜯습니다.

“모찌가 앞으로 어, 솔이와 못 논다고 마, 말하려고 왔어요. 어, 솔이에게 꼭 말하고 싶었어요. 솔이는 세, 세상에 하나뿐인 모찌의 베프니까요.”

저는 말괄량이 모찌를 떠올립니다. 남의 공을 빼앗아 제 다리 사이로 숨어드는 모찌의 붉은 등과, 물이 마시고 싶을 때면 항상 저를 올려다보는 모찌의 까만 눈과, 간식을 주면 손바닥을 쪼듯이 채가는 모찌 송곳니의 얼얼함을. 말썽 피우는 모찌를 잡아서 안아 들 때의 부드러운 촉감을.

제가 모찌를 귀찮아해서 모찌가 이런 일을 당한 걸까요… 제 탓이 아닌데 꼭 제 탓인 것만 같은 죄책감이 몽글몽글 올라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민하지 말고 잘해줄걸.

“모찌는… 지금 어딨어요?”

“상자에 담겨 마당에 있어요. 아빠에게 화내고 싶은데 화를 내지 못하겠어요. 안 그래도 힘들어하는데 더 힘들어할까 봐.”

모찌 언니가 계속 솔이를 쓰다듬습니다. 혼자 중얼거립니다.

“동생을 한 번도 이겨보지도 못하고….”

순간 저는 깜짝 놀랍니다. 둘이 노는 것을 보고 있었군요! 저는 모찌 언니가 모르는 줄 알았어요. 모찌가 늘 솔이에게 밀리는 것을요.

“이제 가야겠어요. 모찌 장례도 치르고 유품 정리도 하고 할 일이 많아요.”

모찌 언니가 일어서서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습니다.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강변 잔디밭을 떠납니다. 상자에 담겨서 홀로 마당에 있는 모찌에게로 갑니다. 그제까지만 해도 붉은 꼬리를 촐랑대는 모찌와 함께 걸어갔던 길을.

오늘은 모찌 없이 혼자 걸어갑니다.      


그녀가 가고 나서 이제야 저는 솔이에게 묻습니다.

“모찌가 너에게도 베프였니?”

심심해하던 솔이가 눈으로 말합니다.

'네, 베프예요.'

아, 어쩌면 이 말은 이주 전 모찌 언니가 수줍게 고백하면서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기에 일부러 여기까지 슬픈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결국 모찌에게도, 모찌 언니에게도 이 말을 전하지 못하고 말았네요.

늦었지만 간절한 이 말을, 지금이라도 솔이의 언어로 전해봅니다.     

 

모찌야.

네가 없으니까 너무 심심해.

여기서 너와 뛰놀 때 즐거웠는데.

넌 나의 베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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