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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언니 Mar 21. 2024

모래성 #2-5

 남자를 따라 들어선 좀 더 깊숙한 실내는 입구에서 나를 반겨주던 환한 빛깔의 모습이 아닌 약간은 톤다운 된 간접 조명이 가구들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서너 계단 정도 내려왔을 뿐인데 완전한 지하의 바로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의아해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조명 없이 크고 작은 스탠드들이 저마다 다른 밝기의 불을 밝히고 있었다. 어떤 것은 벽면에 붙어있기도 했고, 어떤 것은 길게 세워놓기도 했다. 이런 것들을 일일이 켜고 끄려면 상당히 귀찮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 발 내디뎠다.


 바닥에서 나는 삐그덕 소리에 발끝으로 눈을 옮겼다. 세월을 그대로 품은 오크색 무광의 나무 마루가 깔려 있었다. 이곳을 들어섰을 때 인위적이지 않은 시나몬 향이 약간 섞인 듯한 깊은 우디향이 방향제나 향수 같은 그런 인공적인 향이 아니라 이 바닥재에서 풍겨 나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바닥재를 따라간  왼쪽 벽면 전체엔 천장까지 가득 채운 책장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눈높이의 책들은 자주 읽는 책들인지 반질반질하게 빛이 나 있었다. 제목들을 대충 훑어보니 익히 알고 있는 소설책부터 몇 권의 육아책 그리고 심리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저 높은 쪽 책들은 읽지 않은지 오래된 건지 먼지가 뽀얗게 앉아있었다. 대충 보니 과학과 의학에 관련된 전문 서적들인데, 장기이식, 피부이식, 나노분자, 줄기세포 등등의 관련된 책들이 꽂혀 있었다.


'뭐야, 나 뭐 정말 인신매매 이런 걸로 끌려와서 이 사람한테 연구용 더미 취급받는 거 아냐?'


 별안간 든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내 등 쪽  주방 안에서 무언가 준비하고 있는 안경 쓴 남자의 모습을 들키지 않게 힐끔 곁눈질로 쳐다봤다. 내가 한 방금 전 생각이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안경알이 두꺼운 게 어쩌면 진짜 이 책들을 다 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모습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그 거대해 보이는 책장 오른쪽 구석에는 먼지가 쌓이지 않게 흰 천으로 덮인 아마도 1인 소파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발아래엔 맨발로 있으면 좋을 상당히 포근해 보이는 흰색 러그가 깔려 있었다. 술도 좋지만 저 자리에서 잠시 눈을 감고 앉고 있으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며칠 아니 몇년 동안 피곤에 쩌들어 이런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편하게 자는 것조차 미안한 생각에 나를 최대한 혹독하게 내몰고 다그쳤다. 그렇게 해야만 하루는 빠르게 돌아갔고, 1년 중 11개월 빠르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고 주희가 세상을 떠나던 그 달이 돌아오면 하루는 원래 그랬다는 것처럼 매 순간 천천히 느리게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벽을 따라 눈길을 돌려보니 정면엔 포인트 조명아래 모네의 <바다풍경> 그림이 걸려있었다.


 "오빠 이 그림 어때? 거실에 하나 걸어두면 좋지 않을 것 같아? 거실 벽이 휑한 게 이런 그림이라도 있으면 뭔가 힐링되고 좋을 것 같아. 돌아오는 월급날에 하나 사서 걸어 놓을까 봐."

 "뭐야. 명화야? 그림 걸고 싶어서 흰 벽으로 도배하자고 한 거구나. 뭐 나쁘지 않네. 근데 그냥 내가 그려줄까?"

 "됐거든요. 어디 모네 님 그림 앞에서 천한 실력을 들먹여!! 월급 받으면 결제해야지!!"


 연관된 모든 것들에서 완벽하게 피하겠다 생각하고 애써 찾은 이 낯선 곳에서 조차 흔하디 흔한 그림으로 주희가 떠오르다니. 그 아이가 떠날 때 나 역시 사실은 이 세상을 떠난 것이고 어쩌면 지금 이렇게 서있는 것은 나를 흉내 내는 빈 껍데기뿐인 것은 아날까? 급 몰아친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또다시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런 생각들에 질려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 버텨내고 있었다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늘 그래왔으니까, 정신을 차리고 싶을 때마다 그랬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도록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그래야 현실에서 멀어진 나의 정신을 다시 불러드릴 수 있었다. 내 육체가 있는 현재로 말이다. 근데, 오늘은 이 방법마저도 통하지 않아 나를 속이지 못한 나에게 화가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 등 뒤 편에 있던 남자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손님, 이 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아, 네. 이곳 분위기가 참 좋네요. 저도 모르게 안정이 되는 것 같아요."


 또 쓸 때 없는 가식스런 인사치레를 하는 내가 짜증이 났다. 이래서 내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려 나에게 집중하려고 혼자를 선택했던 건데, 결국 모르는 사람과 함께하게 된 지금도 몸에 밴 친절을 표현하고 있었다.


'피곤하네. 결국, 난 그대로의 내가 없는 실존하지 않는 나라는 사람인 건가.'


 "아 그랬다면 참 다행이네요. 손님, 이제부터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편히 계시면 됩니다. 왠지 식사는 못하셨을 듯해서 뜨끈한 어묵탕과 따뜻하게 데운 사케를 준비했습니다. 취향에 맞으실는지요?"

 망상에 빠져 고개숙인 나를 다시 건져올린 남자의 말에 놀라 소리가 난쪽으로 눈를 떠보니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남자가 친절하게 웃고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해 배가 많이 고팠거든요. 따뜻한 사케도 정말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얼른 드시라는 제스처를 하곤 어느새 주방으로 들어갔다. 뜨끈한 국물을 그릇에 덜어놓고 너무 뜨겁지 않게 데워진 사케를 잔에 따라 한 모금 털어내듯 마셨다. 약간 추워서 그랬을까? 여느 때 보다 빠르게 알코올의 기운이 온몸에 퍼졌다. 그 때문이었을까? 순식간에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끈한 국물과 함께 어묵을 하나 베어 물었다. 푹 익은 무와 보이지 않는 가쓰오부시향이 심심한 듯 묵직하게 입안을 감쌌다. 어묵은 질기지 않고 부드러웠으나 불어있지 않아 씹는 식감이 좋았다. 배가 고파서 그런가 평범해 보이는 어묵탕이 오늘따라 너무 맛있었다.


 사케와 어묵탕을 몇 번이나 먹었을까 몸에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따뜻하다.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어머니께서 힘겹게 해 주시던 저녁상보다 급하게 넘기던 역전 가락국수보다 따뜻했다. 내 생일만을 위해 차려졌던 미역국처럼 지금의 간소한 술상은 너무도 따뜻했고, 몇 년간 참아냈던 눈물이 아무런 저항 없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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