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나에게 #13
책을 샀다.
아기를 위한 그림책이 아닌, 이유식 책도 아닌 나를 위한 책은 오랜만에 산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 동안 읽을 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일본에 다녀올 때 한꺼번에 많은 책을 사 오는 편이라 못 읽은 책들이 많았다.
시간이 되면 새로 사지 말고 그 책들을 먼저 읽을 생각이었다.
(참고로 일본어로는 미리 사놓고 조금씩 읽는 것 혹은 읽지 않고 바라만 보는 것을 積ん読(츤도쿠: 쌓아 놓는 독서)라고 한다.)
심지어 읽으려고만 했지 정신없이 흘러가는 일상 때문에 거의 읽지도 못했다.
여가 시간에는 비교적 가볍고 간편한(?) 드라마나 예능을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계가 왔다.
읽어야 된다는 압박감의 한계다.
그리고 읽고 싶은 타이밍이기도 했다.
몸은 힘들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유가 생겼나 보다 싶다.
쌓아놓은 책 중 하나를 골라 읽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재미있는 책이 있는지 검색하다가(이게 츤도쿠 하는 사람의 습관이다) 내가 오래전에 알고 숙제처럼 여겼던 책의 새로운 번역판이 나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목은 '자니는 전쟁터에 갔다'(원서 "Johnny got his gun").
1935년에 출간된 Dalton Trunbo의 소설책이며 일본에서는 오래된 번역본이 있었는데 절판되어 구입을 반쯤 포기하고 있던 책이다.
70년대에는 영화도 제작되었다.
물론 중고책을 구매하면 좋았겠지만 충격적인 줄거리 때문에 읽는 걸 미루고 있었던 것도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전쟁에서 팔다리, 귀, 눈, 입, 코 즉 모든 감각을 잃게 된 남자.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나가면서 과거를 회상한다.
거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전쟁에 대해 미워할 수밖에 없게 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알게 된 건 초등학생 때였고 줄거리만 보고 충격을 받아 언젠가 용기가 생기면 읽어봐야지 했던 책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현재.
사실 용기가 생긴 건 아닌 것 같다.
다만 이제는 진짜로 구매해야만, 읽어야만 풀릴 무언가가 있다고 믿게 되었다.
힘들면 덮으면 되고 쌓아놔도 되니(전자책이지만).
일단 시작을 해보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읽고 있다.
무겁고 어둡고 힘들지만 나는 만족스럽다.
오래된 숙제를 하나 푼 느낌이다.
어제의 너에게
드디어. 드디어 읽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