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동반자들

어제의 나에게 #4

by Illy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평생 도저히 떨쳐낼 수 없을 것 같은 버릇이나 습관, 생각들이 있다.


나는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있다.


완벽 같은 건 있을 수 없다는 거 알면서도 계속 추구하게 되고 내가 정해놓은 이상적인 모습이 나오지 않으면(이상적인 모습이라는 게 나오기나 하는 걸까) 자책하기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한다.

이것 때문에 어찌나 힘들던지.



옛날에는 지금보다 좀 더 심했다.


고등학생 때 이야기다.

시험을 앞두고 카페로 공부하러 가기로 한 날.

카페 오픈런을 하고 원하는 자리에 앉고 싶었고 적어도 4~5시간은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 집에 지갑을 두고 왔다.

카페에 도착하고 그걸 알게 되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의 결제 수단은 오직 현금뿐.


그게 없으니 카페에 당연히 앉을 수는 없었고 무겁게 들고 온 책들을 다시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니 카페 오픈부터 20분 정도 지난 상태였다.

지갑을 들고 다시 가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오픈런이라는 목표가 깨졌기 때문이다.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고 그냥 그날은 어디도 못 가고 집에 있었다. 공부는 하기는 했던 것 같지만 집중은 잘 못했을 것 같다.



그런 일이 허다했다. 머릿속에서 열심히 생각하고 완벽한 계획을 세워놓고 그것대로 안되면 아무것도 못하게 되었다. 간신히 한다고 해도 자책도 잊지 않았다. 자신에게 아주 엄하게 벌을 줬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변경된 일정을 즐기기는커녕 원래 일정을 수행하지 못했던 나를 미워하기 바쁘다. 쉽게 기분 전환이 되지 않는다.



이런 완벽주의적인 성향은 평생 갈 것 같았다.

나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사고를 바꿀 트레이닝도 해보고 어느 정도는 유연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된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가끔은 내가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에 힘들어진다.



하지만 나에게도 이런 성향에서 벗어날 기회가 왔다.

기회라기보다 강제적으로 그런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육아다.



육아는 절대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다.

오전에 하려고 했던 빨래가 오후에도 남아있는 경우도 많고 외출을 위해 아기옷을 갈아입힌 순간 아기가 게워내기도 하고, 분유를 주려고 준비를 끝내니 아기가 잠들어버리기도 한다.


처음에는 그런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많이 내려놓았다.

나에게 벌을 줄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에 못다 먹은 밥이나 먹는 게 낫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건 그나마 제어가 가능한 나 자신도 아니고 완벽한 로봇도 아닌 사람이다.

한 사람과 24시간을 붙어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비록 작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라고 해도 나와 다른 사람인 이상 24시간을 제어할 수는 없다.


나도 아기를 기다리게 되고, 맞추게 되었다. 내가 그런 일이 되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기한테도 '잠깐만 기다려'를 난발하는 매일을 보내고 있다.

서로 맞춰주고 기다려주는 삶을 배워가고 있다.



평생 나를 따라다닐 것만 같았던 내 딱딱한 사고방식이 조금씩 녹고 있다.

이런 날도 오는구나.



어제의 나에게.

완전히 내려놨다고 하기에는 아직 좀 초조해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나름 앞으로 가고 있는 건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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