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나에게 #5
'"쉰들러의 리스트"와 "사운드 오브 뮤직"을 좋아한다고요...?
너무 결이 다른 영화 같은데요.'
어떤 면접시험에서 들었던 말이다.
미리 받은 이력서에 좋아하는 영화를 적는 칸이 있어 두 작품을 적어놨더니 면접관이 이렇게 말했었다.
전쟁 영화와 뮤지컬 영화.
결이 다르다면 다르지만 둘 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아마도 공통점을 알 것이다.
두 영화 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전자는 배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전면에 나와 있지만 말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전쟁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여러 개 있었던 것 같지만 큰 사건 하나를 꼽자면 초등학교 2학년 때에 겪은 일을 언급 안 할 수가 없다.
만 7살 때 여름이다.
나는 조선학교 교복을 입고 시내버스를 타고 하교 중이었다.
조선학교는 도쿄에 몇 개 없어서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버스를 이용하기는 하지만 집과 학교는 꽤나 가까운 편이었다.
아무튼 어느 날 버스를 탔더니.
버스 뒤 쪽 좌석에 앉은 어떤 노인이 지팡이를 들면서 나한테 소리를 쳤다.
'빨리 너네 나라로 돌아가'
'조선인은 여기서 나가'
그 노인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 노인의 폭언을 말리지 않았다. 이건 기억이 흑화(?)되었을 수도 있지만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주변 여성들의 표정이 웃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혼자 그 폭언을 다 듣고 울면서 집으로 갔다.
엄마는 그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우리가 일본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었고 나에게는 내가 태어나고 계속 자라왔던 나라가, 동네가,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아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전쟁, 박해, 차별,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태어난 곳, 혹은 살고 있는 곳에서 안전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어떤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지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들을 찾아보게 되었고 그 관심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무서웠다.
하지만 알아야만 했다.
알고 상상하고, 그래야 아이러니하게도 위안을 얻었다.
'시대가 다르니까 이렇게는 되지 않는다', '현대 일본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헌법 9조도 있고...)'같은 어린아이다운 생각에서 오는 위안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과거에 일어난 비극들을 기억하고 있어야 나와 가족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확실히 있었다.
계속 불침범을 서고 있는 느낌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기특하기도 하고. 어린데 너무 무거운 짐을 들고 있었구나 싶기도 하다.
30대 중반이 된 지금.
전쟁영화는 여전히 본다. 여전히 무섭고 화가 난다. 하지만 나에게는 안 일어날 것이라는 위안은 받지 않는다.
일어날 수도 있고, 나에게 안 일어나도 세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다. 잠깐의 위안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지금은 인간의 잔인함과 욕심에 대한 실망과 그럼에도 그냥 작은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포기와도 가까운 감정이 내 안에 자리 잡은 것 같다.
그래도 알고 싶은 마음은 여전한 걸 보니 나는 아직도 무서운가 보다.
앞으로도 나는 무서워할 예정이다.
무서워서 계속 알고 싶어 할 예정이다.
그래도 그 사건 이후 교복을 안 보이게 하려고 여름에도 겉옷을 입고 다녔던 7살 때 나와는 다른 점이 있다면 알았던 내용을 기억하고 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무것도 못했던 나와 달리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나와 비슷하게 겁을 먹고 있는 아이를 도와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다.
올바르게 무서워하려고 한다. 이제는 고개를 들고 버스를 타야 한다.
어제의 너에게
그 사건 이후 고개 들고 버스 타기 힘들었던 너. 아쉽게도 지금도 그래. 그래도 괜찮아.
잘 이겨내고 목적지까지 잘 가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