펫로스 가벼운 그 이름(10)
2020년 4월 맑은 봄날, 나의 오랜 친구이자 동생이었던 강아지가 세상을 떠났다. 내가 아이에서 어른이 되기까지 함께한 가족과 이별하고 나는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느낌이었다. 삶에 목적과 애정을 잃어버렸고 나에 대한 사랑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아이가 숨을 거둔 순간부터 나는 세상과 숨을 쉬는 법을 잃었다.
사랑이 이곳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사랑을 하게 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더는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나를 과거로 데려다 놓으면서 후회와 자책을 위안 삼아 오늘을 살아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나를 괴롭히고 또 괴롭히는 동안에도 사랑은 여전히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에 아픈 거라고. 아픈 만큼 사랑하는 거라고. 사랑해서 아픈 거라고. 그 아이가 죽으며 모든 것을 가져간 것이 아니라, 나는 모든 것을 잃은 게 아니라, 그 아이는 모든 것을 이곳에 놓고 자유롭게 훨훨 날아간 거라고. 빈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태어난 곳으로 돌아갔노라고. 사랑은 두고 갔노라고. 비로소 죽음을 마주보았다.
이별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만들었다. 죽음을 마주하자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선물로 놓고 간 나의 강아지. '그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도 괜찮을까. 나 그것으로 위로받고 살아가도 될까. 너 없는 세상 버거울 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다독이며 살아가면 될까.'
사람들은 개가 죽으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말한다. 개가 죽었다는 말이 아파서 에둘러 표현하는 말인가 보다. 그리고 무지개다리를 건넌 강아지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강아지와 이별한 사람들이 아프지 말라고 위로하는 말인가 보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이 싫다. 만나고 싶지 않다. 나를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미 만났고 사랑했고 이 세상에서 인연을 맺었고 더없이 소중한 시간을 함께했기에. 다시 보고 싶은 마음만큼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기에.
그렇지만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저 새가 너일까' 하는 생각. 사후 세계나 환생을 믿지는 않지만 이따금 창문 밖에서 새소리가 나면 혹여 나를 찾아온 걸까 창문을 열어보곤 한다. '네가 다시 태어났다면 새는 아닐 텐데.' 내 멋대로 생각하고 만다. 아쉬움으로 창문을 닫고 만다. 이렇게 문득 떠올릴 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다고 다독이면서도. 괜히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아직은 많이 아프다. 인정한다. 아물지 않은 상처라서 미안하다. 웃으며 기억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네가 준 사랑을 모두 이해하기까지는 아직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미리 고백해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너의 사랑으로 살겠다'고 약속한다. 그것이 너의 사랑에 대한 대답이라고.
<네가 떠나고>
네가 떠나고
사랑도 떠난 줄 알았으나
사랑은 여전히 내 곁에 있음을
보이지 않으나 만질 수 없으나
사랑은 진실로 이곳에 있음을
애써 들여다보지 않아도
가득 차 있음을 내 안에 있음을
그 사랑을 비로소 안아
너와 함께 있다
나의 오랜 벗에게
너는 내게 행복을 알려 주었구나. 너는 내게 삶과 죽음을 가르쳐 주었구나. 너에게서 사랑을 배웠구나. 그런 네가 이제 별이 되어 나는 밤하늘에 인사를 한다. 나 잘 있노라고 너는 그곳에서 잘 지내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