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로 유럽에 있는 바이어들과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출근시간을 맞춰야 합니다. 한국 시간으로 7시까지는 근무를 해야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어요."
처음 국내 소규모 무역회사에 취직하는 것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출근시간은 똑같이 9시인데 퇴근시간은 7시였다. 외국과의 시차 때문에 연장근무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7시까지 근무가 필요하다면 출근도 10시에 하는 게 맞을 텐데... 7시까지 근무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그에 맞춰 출근시간을 조정해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사진: Unsplash의Scott Graham
연장근무 수당도 없이 매일 노동법보다 한 시간씩 연장 근무를 했다. 이런 회사에서 복지라는게 있을 턱이 없지. 내가 필요한 날 쉴 수 있는 연차라는건 아예 없었다. 근무조건이 부당하다든가, 법적으로 정해진 최소한의 근로자의 권리도 누리지 못한다거나, 월급이 터무니없이 낮다든가 하는 기본적인 것조차 느끼지 못했던 무지한 시절이었다.
1년 3개월을 근무했고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는 생각에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우연히 외국계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됐다. 영국계 회사, 유럽계 회사, 미국계 회사를 거쳐 다시 유럽계 회사로 왔다. 일이 빡세고 덜 빡세고의 차이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누리는 근로자 혜택은 노동법보다 상위였다.
근무 환경도 유연하고 정해진 연차 안에서 당당하게 쉴 수 있다. 일없으면 칼퇴하고 탕비실에 간식도 있다. 원두커피 머신 있고 업무시간에 출출하면 라면도 먹을 수 있다. 무엇보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합리적이다.
감사하게도 회사를 다니면서 직장 생활이 너무 힘들다거나, 일을 그만두고 싶다거나, 결혼하면 살림을 하고 싶다거나 하진 않았다. 회사 다니는 게 나름 재밌었고, 애 키우면서도 그럭저럭 다닐만했다. 37살에 팀장이 됐다. 팀장이 되고 보니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만 하는 직장 생활이 아니었다. 실무자였을 땐 내가 할 일 하고 퇴근하면 끝이었는데 팀장이 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사진: Unsplash의Annie Spratt
요즘은 실무형 팀장이란 말을 많이 한다. 나 역시 작은 조직에서 실무형 팀장으로 있다 보니 나의 고유한 업무가 있고 거기에 팀장 업무가 덤인 격이다.
"팀장님, 마감 전표가 포스팅이 안되는데요."
"팀장님, 김 대리 업무처리가 원활하지 않습니다. 조치를 취해주세요."
"핸드폰 요금 좀 조정해 주세요."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급하게 휴가를 내야 할 것 같습니다."
"에어컨 작동이 안 돼요."
"김 팀장, 출장 일정이 잡혔네요. 항공권 발권 부탁해요."
내 일도 해야 하는데 팀원들 일하는 것도 봐줘야 하고, 불평하는 거 들어줘야 하고, 타부서와 싸우면 중재해야 한다. 휴가 가면 업무 조정해야 하고, 사무실 청소부터 법인 신청하는 것까지 업무 영역이 점점 넓어진다. 요즘엔 윗사람만큼 아랫사람 눈치도 봐야 하고, 행여라도 잘못된 평가를 받을지도 늘 염두 해야 한다. 여하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 돈 버는 게 왜 이렇게 힘들지. 이런 직장 생활을 언제까지 할 수 있는 거야?'
실무자로 내일 잘 하는 것을 넘어서 항상 신경 쓸 일이 있다. 뭔가 '버겁다'라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월급쟁이로서 앞으로의 수명을 계산해 보기도 했다. 돈 벌기가 힘들게 느껴진다는 건 내가 돈 벌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삼십 대에는 평생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던 55세라는 나이는 어느덧 내 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만큼 나의 신체도 에이징 되고 있다. 삼십 대에는 며칠 야근을 해도 끄떡없었는데. 이제는 하루만 야근을 해도 눈이 침침하고 목 디스크와 허리디스크 통증이 몰려온다. 노안이 시작될 나이이다.
"만일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가장 먼저 노후에 쓸 자금부터 준비할 겁니다. 지금 나를 가장 힘들고 비참하게 하는 것은 바로 수중에 돈이 없다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도 항상 돈 걱정만 했는데·····. 그래도 그때는 그나마 수입은 있었으니 비참하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막연한 걱정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수입도 없이 자꾸 돈 들어가는 일만 생기니 정말 비참할 뿐입니다."
<돈 걱정 없는 노후 30년>의 서문을 읽는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남 얘기가 아니었다. 노후가 오는 건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수입이 끊긴 이후의 삶은 생각보다 길다. 노후준비는 다른 세상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 얘기였고, 나의 미래였고, 사회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같이 해나갔어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걸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