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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가는 설 풍경

쓸쓸히 보낸 설

by 예담

나 어릴 적 설에는 태피터(태피터) 천에 속에는 스펀지가 들어 있고 마름모꼴로 누빈 빨간 점퍼 하나 설빔으로 얻어 입으면 최고였다. 정월 초하루 날 아침 설빔으로 갈아입고 올망졸망 칠 남매가 아버지를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작은 동산 하나 너머에 있는 큰집으로 차례를 지내러 간다. 어머니는 새벽에 먼저 큰댁으로 가셔서 차례상을 준비하고 계신다. 큰집 가족들이 새로 받은 설빔을 알아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이다. 차례를 지내고 배급 주듯 나누어 주는 곶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꿀맛이다. 아버지께서 둘째 시라서 우리 집에는 제사가 없었다. 제사 많은 집이 부러웠다. 제사나 차례를 지내고 나면 꼭 과자를 손에 들고 밖에 나와 자랑하며 먹는 아이가 있다.


어릴 적부터 제사 많은 집을 부러워해서였는지 제사가 수없이 많은 칠 대 종갓집의 종부가 되었다. 양 명절 차례와 계절마다 모시는 시제에 한식에 고조까지 모시는 기제사로 제사의 숫자를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결혼 후 첫 번째 맞은 설이다. 삼 전으로 육전, 어전, 채소전, 시어머님께서는 큰 함지박 세 개에 가득한 전 재료를 준비해 주셨다. 처음 해보는 차례 준비 배우면서 어머님을 도와 함지박 세 개의 전을 다 부치고 나니 허리도 등도 아프고 종일 기름 냄새에 머리까지 지근거렸다.


설날 새벽이 되니 만경 노 씨 집성촌으로 한 동네에 이웃하여 살고 계신 당숙모님들이 우르르 오셔서 차례상 준비를 도와주셨다. 뒤이어 시 숙부님과 당숙에 육촌들까지 집안 남자는 모두 모이니 대청마루가 턱없이 부족하다. 마당에까지 자리를 펴고 차례를 올렸다. 그리고는 넷째 할아버지 댁까지 순서대로 내려가서 차례를 모시고 다시 우리 집에 모여 떡국을 먹는다. 안방 윗방 마루와 사랑채까지 남자들이 꽉 메웠고 여자들은 부엌 아궁이 타다 남은 불씨로 몸을 녹이며 한술 뜨는 모습에 적잖이 놀랐었다. 그렇게 시부모님과 함께했던 명절은 시끌벅적 정신없었다.


20여 년 전 시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모든 기제사며 차례를 우리가 모시고 올라왔다. 시골에 모여 사시던 당숙들도 연세 드시고 각자 자기 집에서 설을 보내게 되었다. 시동생 가족과 가까이 인천에 살고 계시는 시 숙부님 가족 사촌 시동생과 동서에 당질들까지 그때까지도 제법 떠들썩한 명절이었다. 그러다 몇 년 전 시숙부님께서 돌아가시고는 사촌 시동생 가족들도 각자 자기 집에서 설을 쇠게 되었다. 그리고는 아들이 결혼했고, 아들 며느리와 시동생 내외만 참석하는 단출한 명절이 되었다. 올해도 여섯 이서 조촐하지만 즐거운 명절을 준비하며 설빔으로 양말도 준비했고 우리를 찾아주는 사람이 있는 명절을 나름 즐겁게 보낼 계획으로 윷놀이도 준비해 놓았다.


설 전날 새벽부터 눈이 많이 온다. 계속된 대설주의보와 한파경보까지 핸드폰에서는 위험 경보가 계속 울려댄다. 창밖만 보고 있던 남편이 전화기를 열고 아들에게 전화를 건다. 아들은 준비하는 시험이 곧 있고, 며늘아기도 준비하는 일이 있다. 중요한 시기다. 더구나 날씨도 춥고 눈도 많이 오니 걱정이 되었나 보다. 집에서 편히 쉬며 공부나 하란다. 좀 의아했지만 변한 남편이 고마웠다. 그러더니 시동생에게도 전화한다. “동생 눈도 오고 하니 이번 설은 근처에 처가댁에서 보내게 길 미끄러우니 운전이 걱정되어서” 또 한 번 놀랐다. 양 명절과 기제사에 한 번도 빠지지 않던 시동생과 동서다.


분주하게 차례 준비하던 손이 갑자기 할 일을 잊는다. 뭐를 어떻게 하지 “설빔으로 준비한 양말은? 새로 사고 새로 만든 윷판은요?”“둘이 합시다. 양말은 다 내 것이네”하고는 나 잘했지? 하는 듯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다. “양말 모두 당신이 신으려고 못 오게 했어요?” 칭찬해야 하나 핀잔해야 하나 잠시 헷갈렸지만, 곧 “그래요. 아이들도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고, 동서도 결혼 후 처음으로 명절을 친정에서 보내게 되어 좋아할 거예요.” 하고 칭찬했다. 차례에 쓸 전을 부치고 나서 얼큰한 김치전 한 장을 더 붙였다. 허전할 남편에게 김치전에 막걸리 한잔을 내줬다. 막걸리 한잔을 걸친 남편은 “ 괜히 오지 말라 했나?”한다. 그런 남편이 쓸쓸해 보인다.


설 날 새벽잠에서 일찍 깼다. 떡국을 끓이고 준비해 둔 나물을 볶고 산적을 구워 차례를 지냈다. 둘이서 술 한 잔씩 따라 올리니 금방 끝난다. 준비된 떡국으로 아침을 먹고 치우고 나니 8시가 채 안 되었다. 아이들이 전화로 새 해인사를 한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결과 내겠단다. 일찍 차례를 마치고 음복주 한잔을 한 남편은 다시 침대로 올라가 눕는다. 왠지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다. 나도 따라 누워보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지난 명절들을 회상해 보며 앞으로의 명절도 그려본다. 설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앞으로 단출하고 쓸쓸한 명절이 더 많을 거란 생각에 온 가족이 모여 시끌벅적 정신없었던 지난 명절들이 살짝 그리워진다.

**지난회에 설 준비 하며 썼던 글과는 너무나 다른 명절이 되었네요. 설 날 오후 탁구 운동을 하러 갈 시간까지 생기는 여유롭고 한가로왔던 건 사실 이지만 왠지 허전했던 것도 사실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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