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몸으로 피우는 꽃, 단풍
가을나무는 몸으로 꽃을 피운다.
나무는 봄에 꽃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가을엔 몸으로 또 한 번 세상을 물들인다. 잎은 붉어지고(丹), 양쪽으로 날개가 달려 프로펠러를 닮은 열매가 바람 따라 멀리 날아간다 하여 나무(木)에 바람(風)을 붙여 풍(楓)이라 한다. 그래서 단풍(丹楓)이다. 붉을 단(丹)을 붙였지만 붉은색뿐 아니라 주황색, 노란색, 갈색의 꽃을 피운다. 가을 한 철엔 하늘을 올려다보는 버릇이 생긴다. 시야의 윗단엔 파아란 가을 하늘, 아랫단엔 빨강, 노랑, 주황 등등 색색이 알록달록 자리 잡는다.
霜葉紅於二月花
서리 맞은 단풍은 2월의 꽃보다 붉다
중국 당나라 말기의 시인 두목(杜牧, 803~852)의 "산행"(山行)이란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실 도시나무꾼 안톤처럼 인생의 가을로 접어든 사람들에게는 이 만한 시구절이 없다. 황혼기의 증거인 단풍이 전성기를 앞둔 2월의 꽃보다 붉다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안톤도 가을이 되면 괜스레 붉어져 본다. 알록달록하고, 달콤 쌉싸름하게...
가을에는 모든 나무가 제각각의 품성으로 단풍의 대열에 합류한다.
이과(理科)스럽게 말하면 노란 단풍은 크산토필(Xanthophyll), 주황 단풍은 카로티노이드(Carotinoid)가 하는 것이고 붉은 단풍은 안토시아닌(Anthocyanin)이 만드는 색이고 갈색 단풍은 타닌(Tannin)의 작용이다.
문과적으로 표현하면 "단풍 든 산에 가니, 온 세상이 불타"고 (시인 정지용), "가을 산 빨간 잎새에, 뜨거운 사랑 타는 듯" 하며 (시인 김소월)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고(Albert Camus) "가을나무는 몸으로 꽃을 피운다".(도시나무꾼 안톤^^)
가을은 '알록달콤'하다.
여름내 고생하던 겨드랑이에 찬 바람이 스며들고 피부에 닭살이 살짝 올라오는 가을은 도시나무꾼 안톤이 사랑하는 계절이다. 쌀쌀해지면 외투하나 걸치고 내 몸의 콤플렉스를 가릴 수 있으면서도 적당히 멋도 부릴 수 있어 좋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마저 알록달록하다.
가을나무는 누가 뭐라 해도 단풍(丹楓)나무다. 단풍나무는 여름에 준비한 가을의 '색'만큼, 겨울에 준비한 봄의 달콤함도 선사하는 나무다. 가을엔 눈을 즐겁게, 봄에는 입을 즐겁게 한다.
단풍은 영어로 '메이플'(Maple)이다. '액체 금'이라는 불리는 단풍나무 수액, 달콤한 메이플 시럽을 떠올려본다.
캐나다는 국기 중앙에 단풍잎을 올려놓으니 왠지 '가을나라'같다.
하지만 그리 오랜 전통을 가진 국기는 아니다. 1963년이 돼서야 레스터 피어슨(Lester B. Pearson) 총리가 집권하면서 "캐나다만의 독특한 국기"를 만들겠다고 선언했고 수년간의 격렬한 국기 논쟁을 거쳐 1965년부터 사용한 국기다. 영국과의 유대를 강조한 영국계와 국기변경에 찬성하는 프랑스계의 충돌이었다. 결국 영국과 거리를 두고자 하는 프랑스계의 승리로 끝났고, 캐나다는 '영국계 나라'에서 '단풍의 나라'로 변모했다. 좌우의 빨간색 바는 태평양과 대서양이고 가운데 하얀 부분이 영토로 '단풍의 나라'임을 자처하는 이미지다.
단풍나무(Maple)는 북반구의 온대기후대에서 자라는데 그 지역을 메이플 벨트(Maple Belt)라고 부른다. 단풍나무의 학명에는 공통적으로 라틴어 'Acer'(아케르)가 들어가는데 '단단하다'는 뜻으로 목질이 치밀하고 견고해 매우 훌륭한 목재다.
캐나다는 전 세계 메이플 시럽의 77% 정도를 생산하고 있는데, 동부인 퀘벡주와 온타리오주에만 10,000개의 메이플 시럽 농장이 몰려 있고 퀘벡주의 생산량은 2020년 기준으로 캐나다 메이플 시럽 수출의 96%를 차지할 정도다. 매년 12월 17일은 "Maple Syrup Day"로 기념한다고 한다. 명실상부한 '단풍나라'인 셈이다.
메이플 시럽을 만드는 북미의 단풍나무는 이름부터가 'Sugar Maple'(설탕단풍 혹은 사탕단풍)이라 하는데 목재는 매우 단단해 'Rock Maple'이라고도 불린다. 이 나무에서 수액을 채취해 끓이고 졸여 만든 것이 메이플 시럽이다. 학명도 'Acer saccharum(아케르 사카룸)'으로 '사탕수수'라는 단어를 갖고 있는데 단풍나무과의 나무 중 가장 많은 수액을 자랑하고 목재도 단풍나무 중에서는 가장 단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이플 시럽은 북미 원주민인 인디언의 발명품이다.
유럽 정복자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아베나키(Abenaki)족, 이로쿼이(Iroquois)족 등 캐나다의 동부 원주민들은 일찌감치 설탕단풍나무(Acer saccharum)의 달콤한 수액을 이용하고 있었다. 단풍나무 껍질에 구멍을 뚫어 고기를 "달콤한 물"에 절여 먹는 단풍수액 절임 요리까지 있었다고 하니 단순히 마시는 것을 넘어 요리 레시피로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겨울철을 대비하는 식량 저장법으로도 훌륭했다.
이른 봄 원주민에게는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천국의 맛' 시기가 있었다. 단풍나무 수액을 채취하는 시기로 "단풍의 달"(maple month) 혹은 "설탕의 달"(sugar month)로 불렀다.
원주민이 수액을 시럽으로 만든 이유는 오랜 보관을 위해서다. 1년에 한 번이 아닌 1년 내내 단풍수액을 먹기 위해 개발해 낸 것이다. 이러한 원주민의 메이플 시럽 이용법은 17세기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온 유럽 정복자들에게도 큰 경제적 이득을 가져왔다. 당시 영국의 서인도제도에서 생산하던 비싼 사탕수수의 달콤함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이플 시럽을 '액체 금'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채취한 단풍나무 수액은 '설탕 하우스'(sugar house, sugar shack)으로 가져와 끓여서 시럽을 만든다. 끓이면서 수분을 증발시키는데, 1리터의 메이플 시럽을 만들기 위해 약 40리터의 수액이 필요하다. 즉 39리터의 물을 증발시켜 1리터의 시럽을 얻는다. 수액 상태에서는 희미한 단맛이 나는 묽고 맑은 액체지만 끓여서 졸이면 찐득하고 달콤한 시럽이 된다. 캐나다 농장에서도 3,000평 정도의 단풍나무숲에서 250리터 정도의 시럽을 생산한다고 한다.
수액 채취는 밤 기온은 영하, 낮 기온은 영상으로, 일교차가 15℃ 이상 날 때가 가장 좋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경칩(驚蟄) 때가 좋다고 한다. 설탕단풍의 수액을 받을 때는 나무껍질을 V자 모양으로 파거나 관으로 나무에 구멍을 뚫어 묽은 수액을 내려받았는데 어딘가 많이 들어 본 익숙한 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서 고로쇠나무의 수액을 받을 때도 같은 방식이기 때문이다.
고로쇠나무도 같은 단풍나무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단풍나무(Aceraceae)로 고로쇠 수액이 'K-메이플 시럽'이겠구나 싶다. 다만 우리는 묽은 고로쇠 수액을 그대로 마시고 있어 음용법이 다르다. 한번은 캐나다의 메이플 시럽처럼 졸여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고로쇠 '시럽'을 검색해 보니 이미 상품으로 떡하니 나와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2024년에 싱가포르 난양공대와 경북도, 한동대 등이 '울릉도의 고로쇠나무 수액으로 메이플 시럽을 만들면 캐나다보다 부가가치가 높을 것'이라는 발표까지 있었다.
고로쇠 '시럽'의 생산과 상품화의 성공여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도시나무꾼 안톤이 어떤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마다 이미 앞서 생각한 사람들이 있다는데 늘 놀라곤 한다.
고로쇠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단풍나무 중에서는 가장 굵고 높게(20m) 자란다. 영어로 'Painted Maple'이라 한다. 단색의 붉은 단풍이 아니라 한 나무에서 노랑에서 주황색까지 다채로운 색의 단풍이 들어 이름에 'Painted'가 들어갔다.
우리말의 '고로쇠'는 다른 어원이 있다. 신라말기의 도선국사가 좌선을 마치고 일어서는데 무릎이 펴지지 않자 근처 나뭇가지를 잡았는데 그 나뭇가지가 부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부러진 나뭇가지에서 수액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받아 마시니 무릎이 펴지고 원기가 회복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 나무를 뼈에 유익한 나무라는 뜻으로 '골리수'(骨利樹)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 '고로쇠'의 '믿거나 말거나' 어원이다.
단풍나무의 목재는 "하드 메이플"(Hard maple)과 "소프트 메이플"(Soft maple)로 나뉜다. 얀카지수(Janka Index)로 1,000을 넘는 단단한 하드 메이플과 1,000 이하인 소프트 메이플이 있다. (얀카지수에 대해서는 04화 소낙비 내리는 날 참고) 수액이 많아 메이플 시럽 채취가 가능한 나무는 Sugar Maple(설탕단풍), Black Maple(흑단풍), Red Maple(적단풍), Silver Maple(은단풍)이다.
단풍나무를 영국에서는 시커모어(Sycamore) 혹은 시커모어 메이플이라 부르는데 유럽과 서남아시아의 단풍나무를 말한다. 단단하고 치밀한 나무를 편애하는 안톤은 '하드 메이플'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물론 가격도 소프트 메이플에 비해 더 비싸다.
한국에서 자생하는 '단풍나무 3형제, 고로쇠, 복자기, 신나무'의 비중을 추정해 보면 모두 '하드 메이플'에 속할 것으로 예상된다. 단풍나무 중에 가장 단단한 목재가 Sugar Maple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 토종 단풍인 '복자기'가 더 단단할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복자기'는 얀카지수를 측정한 기록이 없어 추정만 할 수 있다.
복자기는 '나도 박달나무처럼 단단하다' 주장(?)한다 하여 '나도박달'이라고도 불리는데 실제로도 매우 단단해 예로부터 무거운 짐과 거친 흙길의 충격을 이겨야 하는 수레의 차축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복자기에 대해서는 09화 너와 나, 선 그은 날 참고)
외국에서는 '아무르 메이플'(Amur maple)이라 불리는 '신나무'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예로부터 줄기와 잎은 군복(軍服)과 법복(法服)의 염료로 사용되었던 신나무는 최근에 고로쇠나무보다 수액을 더 많이 채취할 수 있는 나무로 주목받고 있다.
2017년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신나무는 나무 한 그루에서 하루 평균 4.1L의 수액이 나와 고로쇠나무(2L)보다 2배 이상 많은 수액을 생산한다고 한다. 게다가 칼륨 함량이 18.52ppm으로 고로쇠 수액의 9.2ppm보다 두 배 이상이고, 나트륨 함량은 0.94ppm으로 고로쇠 수액의 15.7ppm의 1/10 수준으로 낮아 훌륭한 건강음료로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수액의 당도가 1.8 브릭스(brix)로 고로쇠 수액(2.5 brix) 보다 낮아 시럽으로 만들 경우 '달콤함'의 정도는 조금 더 낮을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래도 고로쇠보다 두 배 이상 수액을 생산하는 신나무도 'K-메이플시럽'의 상품화를 기다려 봄 직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하게 보이는 단풍나무는 표에는 없지만 '당(唐)단풍'이라 불리는 나무다. 한국과 중국, 러시아에 자생하고 산에도 많고 도심 공원에서도 아파트 단지에서도 조경수로 많이 볼 수 있다.
재밌는 것은 2025년 4월에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이 당단풍나무 추출물이 식욕을 억제하는 유전자 발현을 촉진하고 식욕을 돋우는 유전자 발현은 억제한다고 발표했다. "식욕 억제 성분이 시장의 비만 치료제 성분인 리라글루타이드(liraglutide)의 효능과 비슷한 수준"이라며 발표에 앞서 특허로 출원하기까지 했다. 조만간 '당단풍 비만치료제'나 '당단풍 다이어트약'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유럽에서 명품 바이올린은 상판은 가문비나무를 사용하지만 옆판과 뒤판은 주로 유럽에서 자생하는 하드 메이플의 일종인 'Sycamore maple'을 사용한다. 가볍고 부드러운 가문비나무는 음색을 더 풍부하게 하지만 바이올린의 모든 판을 가문비나무(Spruce)로 만들면 악기 자체의 내구성이 너무 약해지므로, 내구성과 소리의 조화를 위해 선택된 목재가 하드 메이플이다.
울림통이 있는 현악기는 이렇게 소리의 진동과 음색을 위해서 앞판은 가볍고 약한 나무를 쓰고, 악기 전체의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다른 부분은 단단한 나무로 보강한다. 미국산 바이올린은 시커모어 메이플 대신 미국에 자생하는 Sugar Maple(설탕단풍)이나 Black Maple(흑단풍)을 사용한다. 메이플 시럽을 채취하는 나무들이니 '달콤한 소리'를 기대해 봐도 좋겠다.
메이플 목재를 자주 볼 수 있는 곳은 농구장이다. 바닥재로 '하드 메이플'을 사용하기 때문. 미국 NBA가 1946년에 창설되면서 농구 경기장은 메이플 바닥을 표준으로 채택했고 이후 전 세계 농구장의 바닥표준이 되었다. 밝은 바닥이 필요하면서 탄성이 일관되어야 하고 충격에 저항성이 크며 온도와 습도에도 강해 변형이 적어야 하는 곳에 선택된 나무라는 뜻이다. 훌륭한 목재임을 이보다 더 확실히 증명하기는 어려울 듯 싶다. 반면 배구장 바닥은 메이플 외에도 참나무나 물푸레나무 등 다른 나무도 사용한다. 농구만큼의 일관된 탄성이 필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단풍인 고로쇠나무도 볼링이 국내에 도입되면서 목재로써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다. 볼링장 마루판과 핀을 고로쇠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단단하고 충격에 강해 한 때 비싼 목재로 각광받았다. 현재는 고로쇠나무를 목재로 만나보기 쉽지는 않다.
또 다른 경우는 야구 방망이다. 미국의 메이저 리그(MLB)에서는 1890년대부터 물푸레나무인 애쉬(Ash) 목재와 가래나무과의 히코리(Hickory) 나무가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하드우드로 충분한 탄성과 단단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01년 배리 본즈(Barry L. Bonds)가 물푸레나무(Ash) 배트 대신 단풍나무(Maple) 배트를 사용해 한 시즌 73 홈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후 메이저 리그 선수들이 단풍나무 야구 방망이를 선호하기 시작해 현재는 메이플 배트가 대세가 되었다. 단풍나무는 단단하고 밀도가 높아 단타중심의 교타자보다 충분한 힘을 가진 슬러거들에게 적합하다고 알려져 있다.
재미있는 세계적인 명품 바이올린 이야기를 덧붙인다.
전 세계 모든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갖고 싶어 하는 단 하나의 악기를 꼽으라면 십중팔구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를 고른다. 18세기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명장,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1644~1737)가 만든 바이올린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600 대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그가 1721년에 제작한 스트라디바리우스 ‘레이디 블런트’는 2011년 경매에서 1590만 달러(약 230억 원)에 팔릴 정도로 '신의 악기' 수준이다.
17~18세기에 제작된 바이올린 중에 과르네리(Guarneri)와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최고의 명품으로 꼽힌다. 남성적인 소리를 낸다는 과르네리는 가장 뛰어난 것에는 '델 제수'(del Gesù)를 붙여 ‘과르네리 델 제수’(Guarneri del Gesù)라고 부르고, 반면에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여성적이고 섬세한 소리를 낸다고 한다.
과르네리 델 제수와 스트라디바리우스는 300년이 지난 지금도 최상의 소리를 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17~8세기에 만든 이 바이올린이 아직도 현대의 기술로 만든 바이올린보다 더 좋은 음색이 나오는 것일까?
여기엔 널리 알려진 설이 있다.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제작된 당시의 기후가 이 명기를 탄생시킨 비밀이라는 설이다. 전 세계에 소빙하기의 한파가 있었던 17~8세기 기후 때문에 당시 가문비나무와 단풍나무의 나이테가 더 촘촘하고 밀도가 더 높아졌다는 주장으로, 그래서 소리의 스펙트럼이 균일하고 음정 변화가 거의 없는 명기가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정설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당시의 한파가 지금은 없음에도 스트라디바리우스 등을 만들었던 알프스발 디 피엠(Val di Fiemme) 지역의 가문비나무는 'Alpine Spruce'(알파인 스프러스)라 부르며 더 비싼 값을 받는 브랜드 목재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색다른 주장이 등장했다.
2006년 'Nature'지에 실린 텍사스 A&M 대학교 생화학자 조셉 나그바리 (Joseph Nagyvary) 교수의 "Wood used by Stradivari and Guarneri" 논문이다. 나무 자체의 특성보다 목재에 처리된 화학 물질(보존제, 산화제 등)이 바이올린 음향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다.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 가문이 살던 시기, 북이탈리아에는 목재 부패와 벌레 피해가 심해 정부가 화학적 방부 처리를 권장했고 스트라디바리와 그 제자들도 바이올린을 보호하기 위해 도료를 발랐는데 이 도료가 스트라디바리우스 특유의 음색을 만들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나무가 아니라 도료가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후 BBC, ScienceDaily, NYT 등 언론에서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비밀이 풀렸다?"라는 식으로 크게 다뤄지면서 큰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악기 제조업자들은 "음색의 비밀은 장인들의 구조 설계와 장인의 감각이지, 단순히 도료 때문일 수는 없다"라며 반발했고 나그바리 교수는 "단순한 도료가 아니라 목재내부로 스며들어 목재 자체의 화학적 변화가 있었다"며 재반박했다.
아직도 이 논쟁은 진행 중이다. 어쩌면 영원히 진행될 논쟁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 논쟁과 별도로 'Player preferences among new and old violins'라는 이름으로, 연주자들이 과거의 명기(스트라디바리우스, 과르네리 델 제수 등)와 현대의 악기 중 어느 쪽을 더 선호하는지 블라인드 테스트가 여러 번 진행된 바 있다.
2010년 인디애나폴리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신형 6대, 구형(스트라디바리 2대, 과르네리 1대) 6대를 준비해 21명의 연주자들에게 안대를 씌우고, 어두운 호텔 방에서 1대씩 연주해 보도록 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옛 명기가 아니라 현대의 악기를 선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테스트 전에는 연주자들이 "구형 악기를 식별할 수 있다"는 주장했지만, 결과는 거의 구별해내지 못했고 심지어 현대의 악기가 더 소리가 좋다고 판단했다.
2012년 파리에서도, 2014년 뉴욕에서 같은 테스트를 진행했지만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네리 같은 구형 명기들이 "절대적으로 더 뛰어난 소리를 낸다"는 전통적 믿음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결론이었다.
어쩌면 이 모든 논쟁의 원인은 진정한 소리효과가 아니라 명품의 브랜드 효과였을 수도 있겠다.
나그바리 교수의 주장처럼 도료가 목재로 스며들어 목재 자체의 변형되었다면, 목공에는 도료보다 더 강력하게 목재 자체를 바꾸는 방식이 있다. 태우거나 익히는 것이다. 이것을 "목재 탄화"(wood carbonization, wood charring)라 하는데 나무의 표면이나 내부를 고온으로 부분적으로 태워 탄소층을 만들어 내구성이 높이는 기술이다. 별도의 탄소막이 만들어지므로 방수도 잘 되고 습기, 곰팡이, 벌레등에도 강해진다.심지어 더 단단해지기까지 한다. 역설적으로 나무의 몸을 태워 나무를 더 강하게 하는 것이다.
단풍나무인 메이플 목재는 대개 밝은 색상을 갖고 있다. 탄화과정을 거치고 나면 색상이 진해지는데 이것을 '탄화 메이플'이라 한다. 탄화목을 만드는 것은 거의 모든 나무가 가능하다. 하드 메이플과 탄화 하드메이플 목재를 보면 색감 차이가 두드러진다. 이번엔 '같은 목재, 다른 색깔'로 목공작업을 해야 할 것 같다.
탄화를 거치는 이유는 목재에 생긴 탄소막이 일반 목재보다 3~5배 오랜 기간 견디게 하고 부패 속도를 더디게 하기 때문이다. 탄화목은 일반목재가 갖고 있는 휘어지거나 변형되는 성질을 90% 이상 개선하고 기후변화에 따라 수축과 팽창을 극심하게 반복하는 일반 목재에서 완전히 탈바꿈한 목재다. 탄화(炭化)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불로 태우는 방식과 고열로 익히는 방식이다.
먼저 태우는 방식이다.
예로부터 사용하던 고전적인 방법으로 표면을 2~3mm 불에 태워 목재의 수분을 없애고 부패와 병충해를 막는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낙동법'(烙桐法)이라 하는데 목재의 겉면을 인두나 불로 지지거나 그슬린 뒤, 볏짚이나 어피 등으로 문질러 무늬결을 남기는 마감법이다. 일본에서는 '야키스기'(焼杉, Yakisugi, 영어로는 "Shou Sugi Ban") 법이라 한다.
우리나라는 주로 오동나무(桐)를 대상으로 해서 이름이 낙동법(烙桐法)이 되었고, 일본에서는 주로 삼나무인 스기(杉, sugi)를 대상으로 해서 이름을 야키스기(焼杉)라 한다.
공방에 있는 느티나무 판재로 낙동법을 해봤다. 불로 겉면을 태운 뒤 솔로 재를 모두 긁어낸 다음, 오일을 발랐다. 재는 전혀 묻어 나오지 않으면서도 꽤 믿음직스러운 까만 목재가 되었다. 느티나무 원목과의 색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방식은 나무의 진액이 연소과정을 거치며 캐러멜 성분을 남기고 숯이 되면서 리그닌이라는 성분과 만나 딱딱하게 굳는 원리를 이용한다. 그래서 방수 효과 및 내부식성, 방충이 되고 미생물의 번식도 억제하는데 일본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지은 목조 건축물을 종종 볼 수 있다.
두 번째 탄화법은 고열로 익히는 방식이다.
산소를 차단한 상태에서 180~240도로 48~96시간 동안 가열하면서 목재 안에 있는 수분과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는 고열처리 방식이다. 낙동법처럼 까맣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진한 갈색으로 변한다. 현재 목재상에서 탄화목을 구입하면 대부분 이 방식으로 탄화한 것들이다. 태우는 낙동법은 일일이 수작업을 하기 때문에 대량생산보다 전통적 수작업에 사용하지만, 고열처리 방식은 대량 생산에 적합하다.
불로 태우는 방식이나 고열로 익히는 방식이나 모두 화학물질 첨가 없이 목재의 내구성을 높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까만색(낙동법)과 진한 갈색(고열처리법)의 색의 차이를 이용하는 목공에 이용해 볼 수 있다. 다만 일반 목재를 한번 더 가공하기 때문에 탄화목은 원래 목재보다 꽤 비싸진다. 그래도 탄화목은 한 번도 안 써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써 본 사람은 없을 정도로 목공인들에게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원래의 나무보다 진하고 더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메이플과 탄화메이플로 같지만 다른 색이 된 목재로 목공생각을 떠올리다 '엔드그레인'(end-grain) 도마를 떠올렸다. ('엔드그레인'은 12화 진짜가 나타난 날 (上) 참고) 엔드그레인은 나무를 수평으로 잘랐을 때 드러나는 나이테 면을 말한다. 우리말로는 '마구리 면'이라고 부른다.
내추럴 메이플과 탄화 메이플을 교대로 배치시켜 이어 붙인 도마라면 좋을 것 같다. 최근 모백화점에서 티크(teak) 목재로 만들어진 엔드그레인 도마가 전시되어 있길래 가격표를 봤더니 420,000원!!! 목공을 하면서 저 가격을 받을 수 있다면 꽤 여유로운 목공을 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잠시 스쳤다. 하지만 안톤은 상업화를 염두에 두지 않는 '고고하고 여유 있는'(?) 목공인을 자처하기에 애써 모른 척한다.
목공 하는 사람들끼리는 일반 도마는 제값 받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그나마 엔드그레인 도마만 값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엔드그레인 도마는 만드는데 더 많은 노동과 더 긴 시간이 걸린다. 조각조각 잘라내 모든 조각을 새로 붙여야 하는 작업이므로 제작과 접착에 걸리는 시간이 추가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겨우 1주일에 하루정도 시간을 투자하는 안톤같은 목공인에게는 한달 가까이 걸릴 수 있는 작업이다.
엔드그레인 도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일반 나무도마에 비해 훨씬 이쁘고, 마구리 면을 사용하기 때문에 나무의 나이테가 수직이라 칼자국이 잘 남지 않고, 복원력이 좋아 도마로 적합하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반대론자들도 있다. 나무의 기공이 열려 있는 마구리 면을 윗면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곰팡이가 들어가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목재의 조각들을 붙이는 면은 모두 본드를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건강에 좋을 리 없다는 것이다. 물론 도마에 사용하는 본드는 가구에 사용하는 본드와는 유해성이 적은 본드를 사용하지만 그래도 본드는 본드라는 것이다.
이런저런 유해성 논란에도 엔드그레인 도마는 월등한 미관으로 인해 여전히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만큼 가격도 높다. TV 요리프로그램의 유명 셰프들도 모두 엔드그레인 도마를 쓰고 있을 정도로 눈에 띄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엔드그레인 도마는 그 자체로 인테리어 효과가 될만큼 "있어 보인다". 우리 집 부엌에 가져다 놓아도 "있어 보이"고, 누가 와서 봐도 관심을 보일 만큼 "있어 보인다".
엔드그레인 도마가 플라스틱이나 금속 도마등에 비해 손이 많이 감에도 인기를 끄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외모'다. 도마의 성능보다는 "있어 보이는 것"이 엔드그레인 도마의 가장 큰 인기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잘 생긴 것을 어쩌란 말인가...
한 번쯤은 있어 보이고 싶은 안톤도 '메이플'과 '탄화 메이플'을 이어 붙인 엔드그레인 도마를 작업하기로 한다. 같은 메이플이지만 내츄럴 메이플과 탄화 메이플의 색감 차이를 이용한다. 정성스럽게 샌딩(Sanding)하고 "목기시대 UrbanWoodworker Anton"을 새겨넣으며 오늘의 목공을 마감하기로 한다.
가로 460mm 세로 270mm로 만들어진 사진 속 도마들은 주인이 모두 정해졌다. 하지만 정작 우리집에는 엔드그레인 도마가 없다. 명백한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아내가 무거운 도마를 원하지 않아서고 두 번째 이유는 아내가 큰 도마를 원하지 않아서다. 그런데 이번에 만든 도마는 명백하게 무겁고 큰 도마다.
언젠간 주방에 공간을 만들어 멋진 엔드그레인 도마를 올려놓아야겠다. 일단 작고 가벼운 것부터...
보라색 가디건 하나 걸치고
알록달록해진 숲속에서 달콤상큼한 시럽과 함께 가을 산의 아침을 맞는 상상을 해본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머그잔에 담긴 커피가 있고
지지직 들려오는 라디오 방송은 가을 추억 사연을 늘어 놓는다.
산 소리 잘 들리는 어느 휴양림, 오두막 테라스에서...
메이플 도마에 빵을 올려 메이플 시럽을 얹고, 신 맛이 강한 커피를 마시고 싶다.
그럼 도시나무꾼 안톤도 꽤나 있어 보이지 않을까?
#녹색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