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한식파 제이든
제이든이 4개 학기(semester)중 두 개를 마치고 다음 학기가 시작될 때쯤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제이든과 함께 주말에 코스트코(COSTCO)에서 장을 보며 제이든 도시락으로 준비할 크로와상과 햄, 치즈를 담고 있었다.
"엄마, 나 이제 샌드위치 그만 먹고 싶어요..."
"응? 제이든,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이제 점심에 빵 먹기 싫다고요."
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내가 가장 감사했던 일 중 하나는 아침에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호주에서는 매일 아침 초등학생에게 신선한 과일, 음료수(혹은 물), 작은 크기의 간식거리 하나, 그리고 점심 도시락을 싸서 보내야 했다. 제이든은 점심 도시락으로 두 학기 동안 계속 크로와상 샌드위치를 먹었다. 나도 여느 한국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아이가 밥심으로 놀기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도시락을 싸주려고 했다. 어떤 걸 먹고 싶냐고 물을 때 제이든이 항상 샌드위치를 고집했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오는 가정통신문에도 '아이가 얼른 먹고 점심시간에 아이들과 뛰어놀 수 있도록 간단한 점심을 준비해 달라'는 내용이 있던 터라 그날도 별다른 생각 없이 장바구니에 빵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은 빵을 먹기 싫다는 제이든의 말이 나에게는 다소 의아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제이든, 엄마가 계속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네가 샌드위치 먹겠다고 했잖아. 근데 마음이 바뀐 거야?"
"응 맞아, 나 이제 빵 먹기 싫어."
"그럼 엄마가 그동안 물어봤을 때는 왜 말 안 했어?"
"......"
일주일치 장도 봐야 하고 만약 도시락 메뉴가 바뀐다면 그에 맞는 도시락통도 사야 해서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이유는 나중에 묻기로 하고 다시 물었다.
"제이든, 그럼 도시락으로 어떤 걸 싸줄까? 볶음밥?"
"아니"
"그럼... 스파게티?"
"아니"
"흠... 그럼 뭘 싸줄까?"
한참 고민하던 제이든은 생각을 끝낸 듯 날 쳐다보며 말했다.
"김밥 싸주세요."
김밥이라니.... 물론 아침마다 밥을 해먹이기는 하지만 김밥을 싸려면 매일 아침 무조건 의무적으로 쌀을 안쳐야 하네... 김밥 한 줄 싸자고 매일 나물에 달걀에 단무지에 하아... 그걸 다 어쩐다......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다시 제이든에게 되물었다.
"김밥 먹는다고?"
"응. 이제 샌드위치 안 먹고 점심에 김밥 먹을래."
"그럼 그동안 빵 먹기 싫은데 먹은 거였어?"
"다른 애들이 다 빵 먹으니까...... 근데 엄마, 보니까 제니퍼도 밥 싸 올 때 있고, 루이카도 다른 거 먹기도 해."
제니퍼는 제이든 반의 중국인 친구다. 그때서야 알았다. 그동안 제이든은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본인 입맛에 맞지 않는 샌드위치를 그 오랫동안 꾸역꾸역 먹었던 거였다.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해 보니 제이든은 자신이 싸 온 도시락에서 한국 음식 냄새가 나는 것이 걱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친구들과 친해지고 다른 아이들의 도시락을 보니 꼭 모두가 매일매일 샌드위치를 먹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때의 부작용인지 제이든은 아직도 샌드위치는 입에 대지도 않는다) 제이든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안쓰러움과 그런 제이든의 마음을 왜 내가 진작 알아채주지 못했을까 하는 미안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래 알겠어. 엄마가 그럼 이제 김밥 싸줄게!"
호주로 가기 전 내가 자신 있게 할 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요리라고는 참치김치찌개 하나였다. 그랬던 내가 토종 한국 입맛을 가진 제이든의 세끼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아무 준비 없이 내던져졌으니 초반에 메뉴 때문에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초반에는 점심에 샌드위치를 먹어야 하니 아침에 어설프지만 밥을 차렸는데, 제이든이 갑자기 먹기 싫다고 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는 정말이지 화를 참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그래도 뭔가를 먹여서 학교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어르고 달래서 먹였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이모할머니가 해주던 끝내주는 음식을 매일 먹다가 엄마의 맛없는 음식을 먹기 싫을 수도 있었겠다 하는 생각에 웃픈 생각이 든다. 호주에 가서 한 달 정도 실랑이를 하다가 우리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일요일 저녁에 다음 주 식단을 함께 정하고 그렇게 함께 정한 식단에 대해서는 무조건 먹기'라는 법칙을 정한 것이다.
뒤에 자석이 붙어있는 미니 화이트보드에 일주일치 메뉴를 적어서 냉장고에 붙여두었다. 저 메뉴판을 만들고 난 후에는 제이든과 반찬 때문에 다퉈본 적이 없다. 처음에는 건강한 한국 음식을 해줘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저것 다양하게 먹어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렇게 매일 아침 김밥 싸는 루틴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시금치, 김치, 달걀, 햄, 당근 등 김밥재료가 풍부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은 김밥인가 스시인가' 싶을 정도로 재료가 간소화되었다는 사실은 숨기지 않겠다. 마지막 한 달은 제이든이 가장 좋아하는 조합 - 구운 김치, 스팸, 달걀 - 이 세 가지를 넣었다. 미스터리는 제이든이 지금은 김밥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굳이 미스터리라고 말하는 이유는 내가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그래도 호주에서 1년간 밥을 하다 보니 요리 실력도 좀 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제이든의 학교 '학부모의 밤' 행사에 각국의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오는 미션이 주어졌는데 나는 그동안 매일 아침 갈고닦은 실력으로 다양한 모양의 김밥을 선보였고 이건 '스시'가 아니라 한국의 '김밥'이라는 것을 알리는 뿌듯한 일도 있었다.
지금은 다시 요.알.못. 엄마로 돌아갔지만 그때를 떠올리며 사진들을 찾아보니 사람은 역시 환경에 다 맞춰 살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 아침에는 제이든이 좋아하는 김치찌개라도 끓여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