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도적 차원의 문제는 이산가족 상봉이다. 1970년대부터 이어진 남북대화의 주제는 이산가족상봉이 온 국민의 열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1983년 6월 한국방송공사는 24시간 생방송으로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했다.
처음 시작은 며칠로 끝낼 계획이었으나 연일 계속 늘어나는 이산가족의 사연이 늘어나서 136일 동안 10만 명 이상 출연 5만 3천여 명의 눈물 나는 사연이 소개되고 1만 189 가족이 상봉을 했다.
1985년 첫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나의 고향 횡성까지 포함한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는 1970년대 반유신 활동을 활발히 했다.
여동생 지용화를 북에 두고 위서 죽기 전에 여동생을 만나게 해달라고 신청을 했다. 첫 남북이산가족 대상은 나이도 고려해서 선정했기에 고령자 축에 드는지 주교가 선발된 것이었다.
천주교 주교답게 여동생을 만난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을 했더니 여동생 입에서 상상도 하기 힘든 말이 쏟아졌다.
우리는 살아서 천당 가는데 오빠는 죽어서 천당을 가겠다니 오빠가 돌은 것이 아니냐고 공격했다. 물론 그 상봉장에는 북한의 안내원이 상봉하면서 남과 북의 상봉자 대화를 모두 체크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 주교는 이렇게 만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을 하려는데 여동생이 말을 가로채면서 오빠는 예수쟁이 다 됐어요. 하나님은 무슨 다 수령님 은덕이라고 강변했다.
주교는 착잡한 표정으로 여동새에게 네 가 여기서 세뇌 공작을 많이 받았구나 한마디만 했다. 다음날 주교는 고려호텔 3층에서 분단 이후 최초로 미사를 집전했다. 기도문을 강독하던 지학순 주교는 눈물이 울컥 솟아 미사를 한동안 이어가지 못했다.
이후 원주교구 주교 시무실에서 엄청 울다 선종하셨다.
북의 여동생을 만난 후로는 정치적 행동 대신 사회복지나 장애인 도와서 자활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했다.
지학순 주교가 원주의 학생운동권의 후원자로 지역 어른으로 힘든 일을 많이 하셨다. 나이가 들어서는 무위당 장일순 기념사업회 구범모 이사장이 대방동 S중학교 동창이다. 평택에서 중학 2학년 때 전학을 와서 1학기에 뽑은 반장이 2학기에 자동으로 반장 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해서 반장 선거를 했으나 백 우라는 학생이 반장이 되었다.
번호 추첨으로 흑석동 고등학교 같이 배정받았으나 대방동 S중고등학교처럼 절도가 없다고 퇴교를 했다. 재수하여 S고등학교를 갔다.고등학생이면서 그는 흥사단 강당에서 하는 시국강연회에 매회 참석했다.
연세대학교 원주 캠퍼스 학생회장이 되어 시위를 주동하다 경찰에 체포되면 윈주경찰서 유치장으로 지학순 주교가 오셔서 원주경찰서장에게 구범모는 풀어주시오 대신 내가 그 자리를 채위주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