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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하다 Sep 02. 2023

슬프면 슬퍼해도 된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오늘 건넬 문장: 『벌새, 김보라, 최은영 외 3명 (아르테)』

그때 그리고 지금의 은희들 각자가 지닌

고통이 고통이 될 수 있기를, 느끼는 그대로.





내 손에는 두 개의 반지가 끼어져 있다.

왼손에는 친구들이랑 맞춘 우정링.  

'Near and Dear', 소중한이란 뜻이 적혀있다.

오른손에는 '至安', 편안함에 이르다는 뜻인 한자가 새겨져 있다. 

반지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땀이 많아 팔찌는 물론 반지에 전혀 관심 없던 내가, 반지에 관심 갖기 시작한 건 영화 <벌새>를 본 이후이다.

부모의 방관으로 무방비 상태로 오빠에게 폭력을 당하는 은희. 가까운 가족 안에서 존중받지 못해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은희에게 영지 선생님이 하는 대사를 만난 후에.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나이, 스물일곱. 졸업장 빼고 이룬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진로를 확실하게 정하고 입시 준비를 해야 했기에, 슬픔이라는 감정은 편집하기 급급했던 시절이었다.

영지 선생님을 따라 손가락을 보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였다. 그러다 생각하게 됐다. 손가락을 보는 건 시간이 드는 것도, 큰 힘이 드는 것도 아니니, 손가락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아지는 글이 적힌 반지를 스스로에게 선물하자고.

나의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친구들과, 나의 소망이 적힌 문구를.


여전히 부정적인 감정을 편하게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사회에서, 나는  반지들을 오래 응시한다.


가끔 발작처럼 화를 내거나 눈물을 터뜨리기라도 하면 ‘쟤는 성격이 왜 저럴까, 앞으로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어른들의 근심 섞인 충고만을 들었을 뿐이다. 겨우겨우 참았던 감정이 내 통제를 벗어나 그렇게 분출되고 난 뒤에는 언제나처럼 자기혐오가 밀려왔다. 아무도 제대로 받아 주지 않는 감정은 언제나 추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럴 때 영지 선생님 같은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은희를 바라보듯 나를 그저 잠시라도 바라봐 주었다면, 내 이름을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 주었다면 나는 그 사람을 영원히 잊지 못했을 것이다.
 고통은 언제 고통이 되나. 누군가의 시선으로, 공감으로 고통은 고통이 된다. 영지 선생님의 눈빛을 통해서 은희의 고통은 비로소 고통으로 이해받는다.

 『그때의 은희들에게, <벌새>, 최은영 해설 (아르테)』


눈물이 많고 잘 삐진 내가 자주 들었던 말은 최은영 작가님과 별반 다르지 않다.

"또 우냐? 또 삐졌냐?,

어휴, 너는 고작 그런 일로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


그런 얘기를 들으면 영화 속 은희처럼 울부짖을 수밖에 없다.

"내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 성격 안 나빠! 나 성격 안 나빠!!! 나한테 이상하다고 제발 그러지 좀 마!!!"


고주알미주알 다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던 나는 '슬픔' 역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곱지 않은 시선들이 따라왔다.

누구나 다 힘들다, 너만 힘든 거 아니다. 네가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면 친구들은 금방 지칠 거야.

넌 너의 슬픔에 자아도취된 것 같아 등등.


나의 슬픔은 그렇게 봉인됐다.


아무도 제대로 받아 주지 않는 감정은
언제나 추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렇게 말하지 못한 슬픔이 몸에 차곡차곡 쌓이면 정제되지 못한 자신을, 밝고 긍정적이지 자신의 성격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 영지 선생님 같은 시선으로 공감을 받는 건 정말 큰 행운이 따르는 일인건 물론이고 매일매일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나서, 나는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슬픔을 얘기하는 책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 묵묵히 좋지만은 않은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인물들. 용기 있게 자신의 아픔을 마주 보는 이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내 마음 한 편 인정받지 못해 숨겨뒀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하나둘 나와 소설 속 인물들과 산책하며 그들의 자리를 인정받아 마음 한구석이 홀가분해졌다. '너희들도 존재해도 돼', 어떻게 보면 단순한, 삶을 직시하는 누군가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부정적인 마음을 환기하자 내 안에 머무르는 슬픔이 제 발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 빈 공간을 '그래도 된다'는 넉넉함으로 채워 나에게 다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슬픔을 떠나보내면서 나만의 시간을 보냈다. 힘이 나지 않는 이야기를 눈치 보지 않고 하니까, 역설적으로 뎌졌다.


이제는 여기 나만의 공간에서, 책방 문을 열어

나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누군가가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슬픔을 터놓는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기에. 그들이 슬픔을, 아픔을 말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자기 자신이 싫으면 좀 어때요.

미우면 또 어떻고요.

자기 마음을 검열하려고 애쓰지 마요.

부정하지도 말고요.

그냥 지금 내 마음이 그렇구나 해요, 우리.


아프면서 아픔을 의심하지 말고

"지금 많이 힘들지?" 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봐요.


나의 이야기를 통해 말하지 못한 슬픔을 마주해 스스로 애도할 수 있기를, 이 책방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못난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써 내려가면서 하루하루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인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경험한 바에 의하면 퍽 도움이 됩니다. (찡긋)

시도 때도 없이 반지를 마음 어루만지듯이 만지고 바라보는 저는 여전히 아프고 슬프지만 왕왕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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