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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 Jul 15. 2023

지금부터 보호자입니다

병원에서 소외당한 사람의 이야기

 병원생활을 오래 한 환자들의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한 가지를 꼽자면 얇고 넓은 의학지식을 가진 보호자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지식과 경험은 때론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불만사항을 토로한다. 가령, 말기암 환자가 마약 진통제를 맞은 뒤 통증이 더 심해지거나 완화되지 않으면 '약이 잘못된 것 아니냐, 주사를 잘 못 논 게 아니냐, 전에는 이거 맞으면 좋아졌는데 이번에는 왜 더 나빠지냐' 하는 게 일반적이다. 


 지금이야 사람 좋게 웃어넘기거나 상황에 필요한 설명을 제외하고 감정에 접근해 소위 '오구오구' 하며 교묘히 빠져나가지만, 1년 차 시절 때만 하더라도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해 꼭두새벽부터 바닥에 트레이를 집어던지고 핏대 세우며 보호자와 싸운 적도 있었다.


 이제 나는 그들이 이렇게까지 억세질 수밖에 없었던 세월을 안다. 그런 이해가 같은 상황에서 나를 침착하게 해준다.


 어느 누구도 보호자의 역할이 이 정도일 것이라고 다짐하며 시작하지 않는다. 의학과는 전혀 상관없던 평범한 사람들이 보호자로서의 자기 역할을 고려해 본 적은 의학 드라마를 볼 때나 혹은 비교적 경미한 질환으로 내 가족이 입원해서 며칠 있던 경험이 대다수이다.


 그래서 보통 입원 초반에는(특히 중환자의 경우) 불안감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알아먹지도 못하는 설명을 듣고 여러 장의 서류 위에 서명을 강요받는다. 보고 듣는 말은 죄다 '사망 가능성', '나쁜 예후', '책임지지 않음' 전부 이 따위 단어들.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설명에 대해 이해했으며 이에 동의함'.


 상황이 자기 자신이라면 그나마 저돌적으로 동의할만한 일들도 당신이 아니기 때문에 섣불리 동의하기 어려워한다. 서명란에 기재된 자신의 이름이 가져올 책임을 어렴풋이 느끼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간호사 입장에서도 유쾌하지만은 않은 게, 딱 봐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인 걸 알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여기, 또 여기 손가락 짚어가며 서명을 받아내는 일은 꼭 사기 치는 기분을 들게 한다. 평생 농사에 매진한 여든 먹은 할머니에게 병동 사용 신청서나 비급여 동의서 등을 받아 본 사람은 한 번쯤 경험하지 않았을까 싶다.


 좌충우돌 시작된 입원은 이제 보호자 신분을 부여받고 대리인이자 전문가로서 책임을 지게끔 만든다.


그들은 길이 2미터, 폭 1미터도 안 되는 간이침대에 누워서  대부분의 시간을 환자와 같이 지내야만 한다.

그리고 의사의 모든 설명을 이해해야 한다. 필요하면 추가로 동의서를 작성한다. 

때론 배설물을 치워야 한다.

밤 새 고통으로 울부짖는 환자를 위해 진통제를 구걸해야 하며, 환자의 짜증을 고스란히 받는다. 

점점 조여 오는 병원비와는 반대로 바닥이 드러나는 통장잔고에 조바심을 느낀다.

병원생활이 길어질수록 회의감은 커진다. 그러나 포기하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상투적인 표현 그대로 몸도 마음도 점점 지쳐간다. 

병원에 입원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믿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워진다.


 한 번은 한 환자가 새벽에 섬망이 도져서 주사 바늘이며 소변줄이며 전부 뺀 적이 있었다. 그때 옆에 있었던 보호자는 전 날 술을 잔뜩 먹고 들어와 우리가 발견할 때까지 세상모르고 기절해 있었다. 선임 간호사는 보호자를 타박했고 보호자는 연신 사과하며 조아리는 모습을 나는 현장을 치우며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얼추 정리가 끝나고 수액줄을 이제 막 연결했을 때, 보호자는 나지막이 말했다.

'엄마, 나 너무 힘들어.'

 그 사람에 말은 나를 향한 것도 아니었고 침대에 묶인 채 낑낑대는 할머니를 향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마음속에 있었던 응어리를 허공에 흩뿌리는 행동에 가까웠다. 나는 처치를 마치고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 질질 끌고 가는 카트 위에 보호자가 뿌린 글자 몇 개가 굴러다니며 돌돌거리는 소리로 나의 은근한 무언가를 자꾸 건드렸다.


 입원한 환자는 우리로부터 치료와 간호를 제공받는다. 그러나 보호자들은 단 하나도 우리로부터 케어받지 못한다. 그들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은 사회가 제시한 시선으로부터 당연한 것으로 치부된다. '그럼 병수발이 쉬울 줄 알았니.'라는 무책임한 말 한마디로 말이다.


 참 슬프게도 대부분의 보호자들은 이렇게나 잘못된 인식에 길들여져서 당신 스스로 아프거나 부정적인 감정이 떠오르면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환자의 진통제를 요구할 때에는 그렇게 정당한 권리를 큰 소리로 외치면서 정작 자기가 먹을 타이레놀 한 알 얻기 위해 새벽에 쭈뼛쭈뼛 나와 공손한 자세로 주저리주저리 자기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한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우리의 방식은 한결같다.

'진료를 보시라'


 판타지 소설에서나 접할법한 '보호자' 호칭을 듣지만 정작 무슨 능력으로 누구를 보호하고 무엇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는지 이들과 우리 아무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병원에서 무슨 보호가 필요한 걸까.


 이들을 보호해 줄 보호자는 누구일까 질문을 던져본다. 이들에게 돌려줄 아무런 이득 따위 없으면서 우리는 무엇 때문에 보호자들을 스포트라이트 밖으로 멀찍이 밀어뒀는지에 대한 질문은 아직도 답변받지 못한 채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이들까지 간호할 여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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