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는 오늘도 (완)

단편소설

by 이계절

세탁소에 맡겼던 블라우스를 찾아왔다. 가슴팍에 묻었던 검댕이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지워졌다. 방문 손잡이에 옷걸이 채로 걸어둔 뒤 잠에 들었더니 새벽녘 물을 마시러 일어났다가 잠결에 귀신인 줄 알고 소스라쳤다.


냉수 한 잔으로 놀란 속을 가라앉히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내가 걸어둔 옷을 보고 내가 놀란 게 웃겨서, 이렇게 웃긴 일을 말할 사람이 없어서.


내 속도 모르고 아침 해가 떴다. 온몸의 물기가 다 말라버린 사람처럼 피부는 버석하고 목소리는 찢어졌다. 밤새 몇 번이나 정수기를 찾았는데도 소용없었다. 잡생각을 떨치려 찬물로 꼼꼼히 오래 씻었다. 오후에 있을 팀장과의 면담에 집중하기로 했다. 보고서와 발표 모두 호평이었으니 남은 건 계약 이야기뿐이다. 회의실을 정리하던 내게 팀장이 건넸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는 말.


기대 끝에는 절망이 오기 쉽기에 함부로 기대하지 않으려 한다. 나에겐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보다 예상치 못한 성취가 더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팀장의 말 때문에 마음이 쉽게 억눌러지지 않았다. 이럴 때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소진이었다. 내용에 상관없이 그냥 소진이 해주는 말이면 다 괜찮았다. 소진이 없었을 때는 어떻게 마음을 진정시켰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소진을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모든 신경이 소진에게 쏠렸다. 뒤돌면 나를 반기며 어제는 모두 홧김에 한 말이라며 쏟았던 말을 주워 담는 소진이 있을 것만 같았다.


“저기요!”


회사를 코앞에 두고 걸음을 멈췄다. 순간 소진이 정말 시간을 되돌리려 찾아왔나 싶었지만 목소리는 고민의 여지가 없는 남성의 목소리다. 적의 없이 상처받은 마음에 인상을 찌푸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호리한 몸에 나와 비슷한 나이대, 어디서 본 듯한 얼굴. 팀장과 싸우던 그 남자였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마케팅팀에 이팀장님 좀 불러주세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팀장을 향한 도의와 인정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이 내 행선지를 알고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 오다가다 몇 번 뵀어요. 저번에 창문에서 보던 분 아니세요?”


남자가 창문을 가리켰고 나도 모르게 앞섬을 손으로 문질렀다. 묻어나는 것 없이 깨끗한 블라우스가 손길을 따라 주름졌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남자의 얼굴은 다시 봐도 낯이 익었지만 동창이거나 어릴 때 알고 지냈던 사이는 아닌듯했다.


곧장 회사로 들어가 팀장에게 어느 남자가 찾아왔다는 말을 전했다.


“오늘 내가 자리에 없다고 적당히 둘러대면 되지,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아……”

“됐으니까 일 보세요.”


팀장은 한숨과 함께 사라졌다. 거의 동시에 팀원들이 속속 도착했고 이번엔 팀장과 남자 대신 팀원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각자 자리에 앉은 채 대화했으니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남자 또 왔네. 이 정도면 팀장님 무죄 아닌 거 아냐?”

“에이. 판결이 그렇게 났는데. 죄가 있었으면 그렇게 깔끔하게 무죄로 안 나오겠지.”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던 팀원이 귀동냥하는 날 발견했는지 슬쩍 웃으며 말을 걸었다. 궁금해요?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침입하는 순간을 들킨 도둑처럼 어색하게. 그들은 친절하게도 도둑을 손수 그들의 구역으로 끌어들였다. 화장실로 이어지는 복도 구석에 셋이 종이컵 하나씩 들고 섰다.


몇 년 전 서울역 앞 은행에 강도가 들었던 일을 기억하느냐며 시작된 이야기는 사뭇 본격적이었다. 팀원이 의도적으로 낮게 깔아 내는 목소리가 괜히 주위를 살피게 했다. 은행 강도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남자의 얼굴이 기억났다. 그 겨울, 은행에서 작은 칼을 쥐고 슬픈 얼굴을 한 강도의 얼굴. 영락없는 가족의 닮음이다. 눈매와 큰 코가 비슷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사뭇 달라 한 번에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범죄자가 그렇듯 강도 역시 처음엔 강도가 아니었다. 내 기억으로는 은행에 있던 순간에도 강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으나 함구했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강도는 어느 날 회삿돈을 개인적으로 유용한 혐의가 발견되어 회사로부터 억대의 고소장을 받았다.


주변인들은 모두 의아했다. 편의점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같은 운동화를 3년째 신는 사람이 수천만 원을 횡령했다는 사실을 잘 믿지 못했다. 하지만 횡령과 소송 이야기가 떠돌자마자 무장 강도로 생을 끝마쳤다는 이야기가 곧바로 이어졌고 갸우뚱거리며 착오의 가능성을 제기하던 몇몇 동료들도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런 놈이었구나.


본색을 숨기고 철저하게 이미지를 관리해 온 범죄자로 마무리되나 싶었던 사건은 그의 동생이 종이 한 장을 들고 회사로 찾아오면서 다시 분위기가 바뀌었다. 강도가 남긴 유서였다. 가만두지 않겠다며 강도의 얼굴을 하고 누군가를 찾기 위해 회사를 헤집었다. 그가 찾던 건 이미 회사를 그만둔 이팀장이었다.


바르고 깔끔한 글씨로 적힌 유서에는 이팀장이 모든 걸 기획하고 지시한 배후라고 설명했다. 횡령을 시도한 것 자체로 벌을 받아 마땅하나 금방 메울 수 있다고 현혹한 이팀장이 꼬리를 잘라버렸다. 유서의 일부분이 사람들 사이에 떠돌면서 새로운 소문이 회사에 퍼졌다.


이팀장의 퇴사 시기가 횡령이 알려지기 하루 전이라는 점,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음에도 일방적 통보로 급하게 그만두었다는 점, 이팀장이 평소에 강도와 친하게 지냈다는 점 등이 묘하게 얽혀 삼일 만에 회사는 유서를 진실로 받아들였다.


누군가 끊임없이 조달하는 소문대로 팀장은 강도의 유가족으로부터 고소장을 받았다. 더불어 형사 입건이 진행되었으나 1심 재판에서 집행 유예, 항소를 통해 무죄를 받아냈다. 그로부터 이 년이 지나 이직한 곳이 지금의 회사였고 입사 당시 팀원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곧 수그러들었다.


팀장은 결과로 능력을, 무죄라는 재판 결과로 결백을 증명했다.


전기수처럼 술술 내뱉던 팀원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직도 팀장에게 강도의 가족이 종종 찾아오는 걸 보아 완전한 무결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우리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고.


멀리서 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야기를 끌어가던 전기수는 삼 분만 화장실에 있다가 나오라며 다른 팀원과 함께 먼저 나섰다. 직원들끼리 오전 회의에 들어갈 시간이니 나는 없어도 그만이다.


화장실에 멀뚱히 서서 거울을 잠시 보다가, 은행에서 봤던 강도의 얼굴과 회사 앞에서 마주친 그 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팀장은 정말 횡령을 사주했을까? 강도는 정말 동료 모두에게 감쪽같이 선인 연기를 했던 걸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중 누군가는 악인이다.


오전 회의가 끝나자마자 팀장은 나를 불렀다. 최대한 웃으며, 회의실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나간 직후라 의자가 뜨끈했다.


“예상했을지 모르겠지만…. 우선 이거 한 번 읽어보세요.”


팀장이 내민 종이는 근로계약서였다. 아빠의 예상은 반만 맞았다. 회사는 내게 기약 없는 계약을 제안했지만 그 형태가 정규직은 아니었다. 근로 형태에 반듯하게 적힌 ‘무기 계약’이 두껍게 강조 표시되었다.


“지금이랑 크게 다르진 않을 거예요. 하던 일 그대로 하시고, 가끔 저번처럼 간단한 분석 보고 정도는 맡길 수도 있지만 어려운 일은 없을 거예요.”


나는 팀장의 설명을 들으며 계약서를 넘겨 뒷장에 적힌 세부 조항을 읽었다. 팀장은 말이 없는 날 보고는 해마다 새로 계약서를 쓰지 않아도 되니 편할 거라며 회사에서도 이런 제안은 처음 해본다고 덧붙였다. 생각 없으면 굳이 서명하지 않아도 된다, 는 말도 함께.


“혹시 언제까지 확답드리면 될까요. 조금 생각해 보고 싶어서…….”

“우리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긴 한데,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금요일까지 말씀해 주세요.”


그때부터 종일 계약서만 생각했다. 돈을 벌어야겠다고는 생각하지만 꿈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분야가 있는 것도 아니다. 계약이 끝난 뒤 구직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독립을 포기한다면 많지는 않지만 적지도 않은 월급이다. 어차피 결혼할 생각은 없으니까. 어차피 아이를 가지지도 않을 거니까. 어차피…….


누군가 오늘도 수고했다며 어깨를 두드리기 전까지 계속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제야 주위를 한 번 둘러보니 다들 기지개 켜거나 짐을 싸는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장을 부리면 지하철역에 사람이 가득 들어차 두 대는 우습게 열차를 그냥 보내야 한다. 그걸 알면서도 천천히 가방을 챙겨 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역 입구에 난 에스컬레이터부터 사람들이 줄을 섰다. 빠르게 더워진 날씨에 다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상태다. 생기 없는 눈빛들 틈에 합류해 함께 지하로 내려갔다. 꽉 들어찬 플랫폼 끝에 서서 열차 세 대를 보내고 나서야 내 차례가 왔다.


이르게 에어컨을 작동한 열차에 타 손잡이를 잡고 나니 문득 열차에서 내리기 싫었다. 밖은 덥고 이곳은 시원하다. 이 많은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다. 집에 가면 근검절약을 외치며 시간제한을 두고 선풍기를 켜는 부모가 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던 애인과 헤어졌다.


열차는 정해진 역마다 사람들을 뱉었다. 새로 열차에 오른 승객들은 또 저마다의 역에서 내렸다. 나는 손잡이를 놓지 못했다. 그러다 내리려는 사람들에게 밀려 엉겁결에 열차에서 튕겨 나왔다. 처음 들어보는 역이다. 걸음을 옮기려고 하니 발이 욱신댔다.


인파 속에서 누군가 발을 밟은 듯했다. 발등이 훤히 드러난 단화를 신어 이름 모를 가해자의 신발 굽이 그대로 상처를 냈다. 다음 열차를 찾아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잠깐 쉬고 싶어 벤치에 앉았다.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는 소리, 통화하는 소리, 자판기가 동작하는 소리 따위가 한데 섞여 어지러웠다. 간밤의 숙취가 이제야 올라오나 싶기도 했다.


눈앞이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그대로 잠에 들었다. 깨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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