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는 오늘도 (3)

단편소설

by 이계절

무시하고 볶음밥을 퍼먹었다. 꾸역꾸역, 혀끝까지 숟가락을 밀어 넣었다. 볶음밥을 퍼내는 그 짧은 순간에 따뜻하게 데워진 쇠숟가락으로 혀를 무겁게 눌렀다. 나는 아무 답도 하지 않고 걸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씹지도 않은 밥알들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어차피 또 금세 뒤집을 말일 테고 그때까지만 너울 치는 마음을 볶음밥으로 누르면 된다.


“얘기를 좀 들어. 언제까지 이렇게 매번 못 들은 척할 거야.”


내가 대꾸하지 않자 소진은 한숨을 쉬고는 가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요즘 스트레스가 많긴 한가 보다. 나는 기어코 냄비 바닥까지 벅벅 긁어먹은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우리 이제 다음 달이면 장사 접어요. 나도 좀 쉬어야겠어.”


이제 힘들어서 못 하겠어. 그렇게 말하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퍽 괴로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손가락 마디가 온통 굽고 부어 제대로 펴지도, 쥐지도 못하는 작은 손이 보였다. 아주머니는 젖은 손을 젖은 앞치마로 닦고는 내가 내민 카드를 받았다. 영수증은 버려달라는 말이 아주머니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고생하셨다거나, 그동안 감사했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었는데도 하지 못했다.

소진은 새벽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소화제를 먹고 잠에 들었다.


간밤에 복통과 설사로 잠을 설쳤다. 한 시가 되자마자 점심을 먹으러 빠져나가는 사원들 뒤로 죽집을 찾았다. 포장하는데 이십 분, 회사로 다시 들어가는데 십 분. 나는 이 뜨거운 죽을 마시듯 먹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잘 들어가지 않아 몇 술 뜨고는 손을 멈췄다. 소진에게 죽 사진을 찍어 보냈다. 회사 근처 죽집인데 맛이 괜찮다고. 비빔밥도 팔고 있으니 나중에 같이 가보자고.


-전화 좀 해봐.


알맹이가 다 빠져버린 옥수수 속대 같은 사무실을 둘러보고 소진에게 전화했다.


“나 선 보기로 했어. 변호사님 지인인데, 좋은 사람이래.”

“뭐? 무슨……”

“우리 예전에 갔던 포장마차 있지. 저녁에 거기서 보자.”


소진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일찍 식사를 마친 사원들이 사무실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저마다 칫솔을 입에 물고 상쾌한 냄새를 곳곳에 뿌리며 다녔다. 속이 좋지 않았다.


언젠가 엄마의 제안으로 엄마와 나, 소진까지 셋이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맘때 소진은 제방처럼 내 방에 있었으므로 엄마는 항상 식탁에 수저 하나를 더 올려놓았다. 엄마는 주변에 가까운 친구가 없어 늘 집에서 홀로 영화를 봤는데, 소진이 영화 포스터 하나를 가져와 내게 호들갑 떠는 걸 보고는 같이 보자며 영화 값을 내밀었다. 소진은 넉살 좋게 헤실대며 넙죽 돈을 받아 당일 저녁 영화를 예매했다. 내 의견은 안중에 없어 보였다. 엄마와 소진 사이에 엉성하게 낀 내 모습이 이상했다.


영화는 두 여자의 사랑을 다뤘다. 여느 사랑 영화와 다를 바 없었지만 내심 엄마를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엄마는 재밌었다는 소감을 내놓았다. 소진과 웃고 떠드는 엄마를 보니 지금이 소진과의 관계를 털어놓을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사실…”

“너네는 서로 친구 잘 만나서 다행이다. 영화에서도 그 친구 하나 잘못 만나서 그게 무슨 창피고 욕이니.”


엄마는 고개를 내저으며 연거푸 몸을 떨었다. 소진이 다급히 내 팔을 잡았다. 엄마에게 이 영화는 기막힌 우정 영화였다. 그날 이후로 소진이 내 방 침대에 누워 낮잠 자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열두 시가 다 되어서 들어온 나와 엄마를 보고 아빠는 혀를 찼다. 엄마는 샐쭉 웃더니 정승처럼 거실 한가운데 선 아빠를 두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하, 참. 오십이 넘었으면 기품 있게 행동해야지. 새벽까지 어딜 싸돌아 다니는 거야. 중얼대던 아빠는 소파에 벌렁 누워 금세 코를 골았다. 그날 우리 가족은 모두 각자 잠들었다.


소진에게 가는 길에 장미를 한 송이 샀다. 한 송이에 육천 원이나 줄 만큼 싱싱한 장미는 아니었으나 포장을 잘 하니 봐줄 만 했다. 주홍빛 천막을 들추며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서니 펄펄 끓는 어묵 국물 냄새가 끼쳤다. 나는 눈짓으로 주인에게 인사 하고는 주위를 잠시 살폈다.


구석 자리에 앉은 소진이 보였다. 검은 블라우스를 입고 구부정한 자세로 두부를 집어 먹는 소진에게 꽃을 내밀었다. 그냥 생각나서, 라는 유행 지난 로맨스 소설에서나 볼 법한 대사도 날렸다. 소진은 말없이 꽃을 받더니 얼마간 멍하니 잎사귀며 꽃잎을 찬찬히 살폈다. 새빨간 장미와 분홍빛 포장지가 소진의 색을 다 빼앗은 것만 같았다.


“잔 하나만 더 주세요!”


더부룩한 속에 소주 한 잔을 밀어 넣었다. 목구멍을 타고 식도 끝까지 술의 경로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나 보다. 그럼에도 뜨끈한 두부 조각에 고소하고 새콤한 볶은 김치를 올려 입에 넣었다.


“오늘……”


소진이 입을 열자 타이밍 좋게 주위가 조용해졌다. 떠들던 남자 두 명이 서로 싸우다 나가버렸고 주인은 믹서를 돌리다 말고 냉장고에 술병을 채워 넣었다. 지금 소진이 꺼내는 말은 사과 혹은 사랑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오늘 결정한 거야. 다음 주에 선 볼 거고, 괜찮은 사람이면 결혼도 할 거야.”


소진은 점심 메뉴 고르듯 말했다. 쉽게 결정한 건 아닐 거라 믿고 싶지만 이미 찢어진 믿음을 어찌 할 도리는 없었다. 소진의 가방 속에서 머리만 내민 장미 송이가 애처로웠다. 그 주위 것들과 너무 달라서.


“집에서 결혼하라고 하셔?”

“우리 부모님은 그럴 분들 아닌 거 알잖아.”


그 말대로다. 소진의 부모님은 소진이 호기심으로 하는 모든 행동을 응원하는 분들이다. 혀에 피어싱을 하면 밥 먹는 데에 걸림돌이 되진 않는지, 타투는 얼마나 아픈지 같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게 기다려주는 분들이다. 덕분에 소진은 학기마다 머리 색이 달랐고 방학마다 다른 나라에 머물렀다. 딸을 믿고 기다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원천은 믿음이 분명했다. 소진은 호기심을 충족하고 나면 다시 돌아왔으니까. 매끈한 혀와 흰 피부로, 어김없이.


“그럼 대체 뭔데. 내 생각은 안 해?”

“헤어지는 마당에 네 생각을 왜 해. 그동안 내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다 무시한 건 너야. 이제 와서 몰랐던 척하지 마.”

“이유도 모르겠고 갑자기 남자랑 선을 보겠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 그게 가능해?”

“너 말고는 내가 만났던 사람 전부 남자였어. 나는 남자 좋아해.”


누군가 갑자기 내 얼굴에 얼음물을 끼얹는데도 소진의 말보단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목소리가 너무 커서 듣기 싫었나 보지. 그래서 찬물을 냅다 부어버렸나 보지. 근데 소진은 6년을 넘게 나와 함께 물벼락을 맞는 사람이었는데. 어떤 비가 내려도 내 옆에서 함께 비를 맞아 주던 사람이었는데.


“나랑 왜 만났어.”

“궁금해서. 쟤는 누군데 항상 웃고 다닐까. 선배들이 시키면 뭐든 거절을 안 할까. 어떻게 3학년 때까지 모든 학기 학점이 같을 수가 있을까. 모든 게 신기했어. 그러다 정신을 차리니까 네 침대에서 손잡고 있더라.”

“지금은 왜 싫은데.”

“다 알아버려서. 항상 웃던 얼굴도 거절을 못 하던 입도 다 용기가 없어서 그랬다는 걸 알아버려서. 처음에는 답답해서 바꿔보려고 했는데 사람 바꾸는 게 어디 쉽겠어. 그냥 그게 너인 걸 어쩌겠어.

지금 이 얘기를 하는 건, 너랑 지낸 기간이 그래도 좋은 기억이었기 때문이야. 변하지 않을 걸 알지만.”


내가 소주 한 병을 비우는 동안 소진은 앞에서 기다렸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갓 구운 떡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던 두부는 차가운 지우개처럼 변했다. 세상 모든 것들이 변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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