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 드로잉
나에게 쓴다는 것은 오래되고 익숙한 행동이다.
초등학교 1학 때 그림일기를 시작으로 초등학생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기 된 지금까지도 일기를 계속 써 오고 있으니까.
어릴 때처럼 담임 선생님이 검사하는 것이 아니라 꼬박꼬박 매일같이 쓴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매년 다이어리를 만들어 그곳에 종종 속마음을 털어놓고 그랬다.
동생과 싸우고 엄마에게 혼나서 속상한 마음, 친구와 마음이 안 맞아 서운한 마음, 남편이랑 다투고 짜증 난 마음, 아이들을 키우며 막막하고 힘든 마음.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을 때, 아무리 말로 하소연해도 속 시원하지 않을 때 그때마다 말간 빈 노트가 내 마음을 받아주었다. 내 이야기를 내가 들어주며 내 마음을 내가 달래 주었던 것이다.
나에게 쓴다는 것은 중요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어주기도 한다.
누군가 말로는 차마 표현하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이나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내 입장 같은 것들은 말로 다다다다 할 때 보다(왜 말로 하면 변명처럼 되거나 자꾸 따지듯이 될까 모르겠지만) 편지나 장문의 카톡 같은 글로 정리해서 표현할 때 훨씬 내 진심이 상대에게 더 잘 전해지는 것 같았다.
또 나에게 글과 그림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긴밀한 친구 같은 관계이다.
그림 작업을 하면서도 나는 작업 일지같이 나의 작업에 대해 쓰고 있다.
물론 시각적인 이미지를 문자로 다 표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하다.
빨강 하나만 해도 수십 가지 아니 수천 가지 수만 가지 다른 빨강이 있는데 어떻게 그걸 글로 표현할까.
하지만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 설명되어야 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쓰다 보면 알 수 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글로 표현되기도 한다는 것.
그리다 보면 알 수 있다.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이미지로 표현되기도 한다는 것.
쓰다가 그릴 것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리다가 쓰고 싶은 것이 생기기도 한다.
브런치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누군가 나에게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왜 글을 '잘' 쓰고 싶은지 되물어 보았다.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 때문에 글이 도리어 잘 써지지 않는 것 아니냐고.
내가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크면 상대에게 내 '진짜'를 보여주기가 힘들지 않을까?
나와 다른 타인들과 섞여서 살아가려면 가뜩이나 내 마음 가는 대로 행동도 다 못하고 내 생각대로 다 말하지도 못하고 살아야 하는데, 종이 위에서 만큼은 그냥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내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