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진짜일 리 없어.
* 본 시리즈는 2021년에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아우! 음식물 쓰레기 냄새! 미쳤어? 술을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와 몰골이 말이 아니네. 술 안 깨지? 아직도 쩔어 있네.. 서울에서 술 만땅 먹고 집까진 어떻게 찾아왔어?"
와이프가 머리를 말리다 말고 아침부터 폭풍 잔소리를 한다. 머리 말고 나를 말려 죽일 작정인가 보다.
시간을 보니 아침 7시 20분.
꿈뻑꿈뻑.
조용히 어제의 기억을 되살려본다.
막걸리를 섞은 폭탄주를 마시고 화장실에 가서 다 토한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도대체 집까지는 어떻게 찾아온 거지. 그것도 서울에서 대전까지.
'형들한테 실수한 건 없겠지'
아니, 형들에게는 실수해도 된다.
'다른 사람들한테 실수한 건 없겠지.'
휴대폰 배터리는 13%.
충전기도 안 꽂아놓고 잠들었나 보다.
핸드폰 잠금을 해제해 본다.
이 순간이 가장 무섭다.
카톡 채팅방 목록을 살펴본다.
이상 무. 다행히 아무하고도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통화 목록을 살펴본다.
이상 무. 와이프와 통화한 내역이 있긴 하지만 와이프에게 실수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리 술이 잔뜩 취했어도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을 것이다.
띠링-
그때, 문자 한 통이 도착한다.
오짬정중앙부동산
[ 에이, 아직 이틀밖에 안 지났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부동산?
내가 어제 부동산하고 연락을 했던가?
급하게 문자 목록을 확인해 본다.
아뿔싸.
[ 소장님, 전세ㅔ세입자ㅏ.는.. 앚직 안 구해져ㅆ쎠여? ]
어제 술 먹으면서 속으로는 세입자 안 구해지면 어떡하지 걱정을 하고 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결국 참다 참다 부동산에 문자를 남겼나 보다.
사람이 술을 마시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본능에 충실해지는 게 맞나 보다. 문자를 할 거면 제대로 하던가. 오타투성이에 누가 봐도 술 먹고 문자 한 티가 팍팍 나네.
서둘러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동산 아주머니에게 답장을 한다.
[ 어제는 운전 중에 문자를 남겨서 오타가 많네요.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푸우.
이 망할 놈의 숙취.
30대가 된 이후로는 과음을 하면 다음 날, 다다음 날까지 일상에 큰 지장을 준다. 20대의 화려했던 체력은 온데간데없어진지 오래다.
냉장고에서 이온음료를 꺼내 입을 대고 벌컥벌컥 마신다. 해장을 해야 하는데 숟가락 들 힘도 없다.
일단 한숨 더 자야겠다.
자고 일어나면 조금 나아지겠지.
두리번두리번.
한 남자가 오짬읍 다이소에서 인주를 찾고 있다.
.
.
.
그 남자는 잠시 후 오짬읍 스타벅스에 허겁지겁 들어간다.
누군가가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남자.
"어후 늦어서 죄송해요, 인주가 없어서 잠시 다이소에 들리느라 조금 늦었어요."
.
.
.
턱.
턱.
턱.
두 남자가 무심하게 서류에 도장을 찍어 내려가고 있다. 뭔가 계약을 하고 있는듯하다.
꿈속이라 그런지 모든 상황이 흐릿하게 보인다.
이 계약서 같은 건 뭐고, 저 두 남자는 누구일까.
.
.
.
모든 계약이 끝났는지 두 남자가 헤어진다.
처음 다이소에 들렸던 남자가 흰색 승용차에 올라타더니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푹 내쉬고 있다. 곧이어 아까 작성한 서류를 다시 한번 꺼내들어 힘 없이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전세 계약서]
.
.
.
* 특약: 임대인은 보증금 감액으로 인한 잔금 *천만 원을 2024년 02월 03일까지 임차인에게 지급하기로 한다.
이런.
이 남자.
역전세를 맞았나 보다. 안타깝다.
그래서 차에 타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고 있었구나.
그런데 남자의 눈빛이 오묘하다. 슬픔이 가득 찬 눈망울인데 이상하게 강인함이 느껴진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눈빛이랄까.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쉬이이이익.
꿈속의 흐릿한 안개가 서서히 걷힌다.
남자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진다.
살짝 쳐져 있는 눈.
오똑한 코.
왼쪽에만 있는 한쪽 보조개.
어? 잠깐만.
뭐? 역전세?
이런 씨바. 이건 깨야 돼. 꿈이라도 믿을 수가 없어.
띵똥띵또로동똥 띵띠이띵띵 땡 똥-
요란한 아이폰 벨소리.
오늘만큼은 이 요란함이 참 고맙게 느껴진다.
참 재수 없는 꿈을 꿨다. 꿈속의 그 남자 아니, 꿈속의 내 표정이 잔상처럼 남아있다.
한숨을 푹푹 내쉬던 내 표정.
이상하리만큼 생동감 있는 꿈이다.
띵똥띵또로동똥 띵띠이띵띵 땡 똥-
전화를 받지 않고 멍 때리고 있는 나에게 화라도 난 듯 아이폰 벨소리는 더욱 요란해진다.
「 오짬정중앙부동산 」
부동산이다. 악몽에서 나를 구출해 준 고마운 부동산 아주머니.
숙취에 목이 지하 4층까지 잠겨있는 상태지만 서둘러 전화를 받아본다.
"어머 주무시고 계셨나 봐요~? 좀 전에 세입자에게 집 보여줬는데 계약하고 싶다고 하네요. 전세금은 2억 3000만 원이구요"
정말 반가운 소식이다. 전세 매물을 내놓은 지 이틀 만에 세입자가 구해졌다. 이틀간의 걱정은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앗, 정말요? 진짜 금방 구해져서 다행이네요! 입주는 언제 하신대요?"
"입주는 매도인 이사 날짜에 맞춰서 하면 될 것 같아요. 이분들도 이제 결혼을 앞둔 93년생 예비 신혼부부여서 입주 날짜는 조율하기 좋을 것 같아요^^"
93년생.
나와는 한 살 차이.
즉, 3년 뒤 2024년에는 30대 초반이 되어 있을 나이. 방금 전 악몽 때문에 조금 찝찝하다.
그러나 꿈은 반대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2002년 월드컵 4강전에서도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네. 계약 진행하시죠. 계약일은 편한 날짜에 맞춰드릴게요"
뚝-
걱정했던 전세마저 해결이 되었다.
게다가 전세가도 단지 내에서 최고가 세팅이다.
숙취가 모두 날아간 듯한 기분이다.
이제 진짜로 투자자가 된 것 같다.
띠링-
[ 전세 계약서는 12월 25일 오전에 작성하기로 했습니다 ^^ ]
2021년 크리스마스에 전세 계약서 작성이라..
재밌다.
꿈과는 반대로
왠지 축복이 가득할 것만 같은 그런 날짜다.
다음화에 계속